이기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이기선(李基善)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 10월 15일
사망 연도
1919년 4월 3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강원도 홍천군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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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기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홍천읍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4월 2일 동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4월 3일 내촌면에서는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시위를 사전 탐지한 일제 헌병의 무차별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강원도 홍천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87년 10월 15일 출생하였으며, 191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이기선(李基善)이라고도 한다.

주요 활동

홍천 지역의 3 · 1운동은 4월 1일 홍천읍에서 시작되어 4월 3일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홍천읍에서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인 오창섭(吳昌燮)과 감리교인 차봉철(車奉哲)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홍천읍의 장날인 4월 1일 신장대리(新場垈里) 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들은 저항하는 군수 김동훈(金東勳)의 팔을 꺾고 칼을 부러뜨렸으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오후 들어 춘천에서 출동한 수비대원과 헌병들이 도착하고 시위대의 일부가 체포되자 일단 해산하였다.

홍천읍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미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동면에서도 계획을 앞당겨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면의 시위도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고 돌아온 민병숙(閔丙肅)이 조카 민준기(閔駿基)와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문중을 동원하여 4월 2일 면소재지인 속초리(束草里)에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시위에는 면장 민병선(閔丙善)과 면서기도 함께 참여하였으며, 홍천읍으로 가 전날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려 하였으나 면장의 만류로 다음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4월 3일 군중들이 속초리에 집결하자 일제 헌병 10명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격투가 벌어져 민병숙이 헌병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동생의 죽음에 격분한 민병태(閔丙台)가 강하게 대항하다 역시 헌병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일제의 총칼 앞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내촌면 물걸리에서의 만세운동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 4월 3일 천도교인 김덕원(金德元)과 천도교 교단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마을의 팔열각(八烈閣)과 그 옆 다리목을 중심으로 모여 시위에 돌입하였다. 당시 약방과 글방으로 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전영균(全榮均)의 집에는 큰 태극기가 높이 게양되었고, 군중 가운데 상당수는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군중들이 모이자 천도교인 이문순(李文淳)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사전에 도관리의 헌병 보조원 홍재호(洪在浩)에 의해 탐지되어, 일제 헌병은 보통학교가 있는 쪽 언덕 위에 몰래 자리 잡은 후,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였다. 이 총격으로 시위 군중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이기선(李基先)을 포함하여 8명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정인 · 이정은, 『국내 3 · 1운동- 중부 · 북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강원도사』(강원도사편찬위원회, 199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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