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봉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서 전개된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장터에 군중이 모이자, 일왕의 기념비를 부수면서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이동봉은 시위대를 이끌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1월 6일 순국하였다.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출신으로, 1894년 1월 27일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가견(可見)이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토계리에 자리한 애산사숙(愛山私塾)과 도산면 서부리에 있는 선성의숙(宣城義塾)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1920년 11월 6일 사망하였다.
같은 마을의 김동택(金東澤), 신응한(申應漢), 이용호(李用鎬) 등과 함께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 · 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예안면의 3 · 1운동을 준비하였다.
예안면의 3 · 1운동은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처음 계획하였다. 신상면은 3월 11일 밤 9시에 이시교(李時敎), 이중원(李中元), 이남호(李南鎬), 백남학(白南鶴), 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제의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자를 3월 17일 예안면 장날로 결정하고,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또한, 인근의 각 마을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1,500명 이상의 군중이 장터에 모였다. 30여 명의 주동자들은 먼저 면사무소 뒤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다이쇼[大正]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부숴뜨린 뒤,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이동봉(李東鳳)이 시위대를 이끌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가 고조되자 출동한 일제 경찰은 현장에서 주동자 15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오후 7시경 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유리창을 부수고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와 함께 25명의 시위대가 추가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그는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세계 각국이 시행하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평화와 인도정의(人道正義)를 주창했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1월 6일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