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지방 통치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지방에 부임한 수령이 지켜야 할 마음가짐과 업무 처리 방침, 지역 사회를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한 이념적·경험적 지침이 풍부하게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목민서(牧民書)’이다. 목민서는 조선 현실과 국가 정책의 변화, 편·저자의 지방 통치 구상에 따라 그 내용과 체제가 변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초기에 중국의 목민서를 수입, 간행하여 활용하는 단계를 지나,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목민서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수령은 한 지역의 행정 · 사법 · 부세 · 재정 · 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을 관장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수령은 국왕으로부터 위임된 통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밑으로부터 지역민의 요구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위로부터는 국왕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밑으로부터 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수용하는 정치적 역량이야말로 수령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었다.
조선 왕조의 지방 통치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지방에 부임한 수령이 지켜야 할 마음가짐과 업무 처리 방침, 지역 사회를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한 이념적 · 경험적 지침이 풍부하게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목민서(牧民書)’이다. 목민서는 조선 현실과 국가 정책의 변화, 편 · 저자의 지방 통치 구상에 따라 그 내용과 체제가 변화하였다. 대체로 조선의 목민서는 초기에 중국의 목민서를 수입, 재간행하여 활용하는 단계를 지나 점차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구체적인 통치 지침서로 변화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조선 왕조의 목민서는 15세기부터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주로 중국의 목민서류를 들여와 간행하여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국의 『목민충고(牧民忠告)』, 『사사십해(四事十害)』, 『목민심감(牧民心鑑)』이 그것으로, 이 가운데 『목민심감』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이들 목민서는 조선의 실정과 일정한 거리가 있음에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한 군현 통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16세기 중반 유희춘의 『치현수지(治縣須知)』는 조선의 현실을 토대로 수령의 자세와 업무 원칙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는데, 이는 주자학을 토대로 한 사족 세력의 지방 통치론이 강하게 투영되었다. 16세기 후반 정철(鄭澈)은 중국 진덕수의 『정경(政經)』 유문(諭文) 2편을 재편집하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 「유읍재문(諭邑宰文)」을 저술하였다. 「유읍재문」은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중국 주자학의 정치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15~16세기의 목민서는 조선 왕조의 지방 통치 체제의 강화와 주자학의 보급을 배경으로 중국의 목민서나 학자의 이론을 차용하면서 점차 조선의 현실을 토대로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수령의 통치 지침으로 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접어들자 조선의 현실에 맞는 목민서의 간행이 활발해졌다. 여기에는 지방 통치의 이념 및 실천에 대한 지식 학술 체계로서 목민학의 전개라는 변화가 놓여 있었다. 목민서는 지방관이나 지방관이 될 사람, 혹은 지방 통치에 관심을 둔 사람이 저자이자 독자로 만들어진 수령의 통치 지침서이다. 이 때문에 수령을 행위 주체로 지방 사회 내에서 올바른 행정 방향은 물론,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침을 분야별로 서술하였다. 여기에는 당대 사회 문제에 대한 진단 및 지방 통치 방안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형태의 글이 수록되었다. 이러한 목민서는 단순히 한두 사람의 독립된 저작을 넘어 당시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던 목민 담론의 산물이라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목민서는 1942년 일본인 나이토 요시 노스케[內藤吉之助]에 의해 일차적으로 수집되어 『조선민정자료: 목민편』이라는 제명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치군요결(治郡要訣)』, 『분우요결(分憂要訣)』, 『목민고(牧民考)』, 『거관대요(居官大要)』, 『삼도(三到)』, 『목민대방(牧民大方)』, 『선각(先覺)』, 『칠사문답(七事問答)』, 『거관요람(居官要覽)』, 『이치정람(吏治精覽)』 등이 실려있다. 이후 1986년에 접어들어 이우성이 『거관잡록(居官雜錄)』과 『근민요람(近民要覽)』을 묶어 『거관잡록 외 7종』(아세아문화사, 1986)으로 간행하였고, 1987년 김선경이 『사정고(四政考)』, 『목강(牧綱)』, 『요람(要覽)』, 『목민고』를 편집하여 『조선민정자료총서』(여강출판사, 1987)로 영인하였다.
조선 후기에 많이 보급된 목민서가 『목민고』, 『치군요결』, 『근민요람』 등의 목민고류인데, 대개 6~8편의 목민서를 취합하여 편집한 형식을 취한다. 목민고류는 개인의 저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저자가 확인되는 목민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광좌(李光佐)가 자신의 사촌 박사한(朴師漢)을 위해 쓴 『정요(政要)』, 이광좌가 감사 한지(韓祉)를 위해 쓴 『정요(政要)』, 한지의 아들 한덕일(韓德一)이 쓴 『이천부사 한함지서(利川府使韓咸之書)』, 조현명(趙顯命)이 조카 조재건(趙載健)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따온 『거관지도(居官之道)』 등이 그것이다. 이에 『목민고』 계열의 서적은 소론계 관인의 지방 통치 방안 및 이념을 다루었다. 목민고류는 다수의 필사본을 남기고 있으며 목민고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체계를 갖춘 목민서들로는 『종정요람(從政要覽)』, 『목민고』(규장각), 『목강』 등을 들 수 있다.
『목민고』 이외에도 다양한 목민서가 등장하였는데,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이본을 가진 목민서는 『선각』이다. 『선각』은 『목민심감』, 이원익(李元翼)이 생질 이덕기(李德沂)에게 준 편지글, 편자 자신의 견해 등 세 부분이 구성의 기본을 이루면서 여러 형태로 내용이 덧붙여져 변이되었는데, 이를 총칭하여 ‘선각류’라고 한다. 『선각』은 조선 초기 활용된 『목민심감』의 틀과 내용을 활용하면서도 조선 현실에 부합하지 않거나 편자의 생각과 맞지 않는 내용은 수정되거나 제거되었다. 『선각』의 편자는 『목민고』 계열의 목민서도 참조하여, 이를 활용하거나 비판하면서 자신의 지방 통치 방안을 제안하였다. 즉 당시 이본이 많이 재생산된 『목민고』 계열의 목민서와 『선각』 계열의 목민서는 각 수령의 지방 통치 방안과 이념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 두 계열의 목민서는 조선 후기 목민서의 양대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안정복(安鼎福)의 『임관정요(臨官政要)』와 홍양호(洪良浩)의 『목민대방(牧民大方)』, 박지원의 『칠사고』와 같이 단독 저술 형태의 목민서도 나타났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정상기도 『치군요결(治郡要覽)』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목민서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19세기 초 정약용의 『목민심서』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기에는 목민관으로서 수령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업무 지침이 ① 부임(赴任) ② 율기(律己), ③ 봉공(奉公), ④ 애민(愛民), ⑤ 이전(吏典), ⑥ 호전(戶典), ⑦ 예전(禮典), ⑧ 병전(兵典), ⑨ 형전(刑典), ⑩ 공전(工典), ⑪ 진황(賑荒), ⑫ 해관(解官) 등 총 12편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각 편이 6개조이므로, 『목민심서』는 총 72개조가 되는 셈이다. 그 자신도 지방관을 역임했던 정약용은 오랜 경학 연구의 바탕 위에 광범위한 자료 섭렵을 통해 지방관의 통치 사례를 뽑아내 분류하고 당시 향촌 사회의 실태와 문제점을 정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붙여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목민심서』는 당시 목민학의 전통을 계승한 위에 정약용 자신의 개혁 사상이 투영되어 조선 후기 목민서가 도달한 최후의 전형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지방관의 지침서로는 물론 국가의 지방 통치를 위한 중요한 참고서로 간주되어 널리 유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