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 운동이다. 한국의 선교 부진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선교사 하디가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다.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은 원산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은 1904년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은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원산부흥운동을 통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 양태가 나타나면서 외래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원산 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중국에서 사역하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가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A. Carroll)과 노울즈(M. Knowles), 하운셀(J. Hounshell), 그리고 캐나다 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I. H. McCully) 등과 함께 한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8월 2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다. 당시 한국 선교 13년 차였던 하디는 선교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실망감과 피로감으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 하디는 선교 실패와 부진의 원인이 밖에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성령 충만’과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당시 하디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다음 주일예배 때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고, 그것이 ‘회개의 본’이 되어 한국 교인들의 공개 자백을 이끌어냈다. 9월 초 하디가 인도한 원산교회 직원 부흥회, 10월에 원산을 방문한 미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지도자 프랜슨(F. Franson)이 인도한 부흥회, 그리고 프랜슨 부흥회 직후 하디가 인도한 특별 부흥회에서도 교인들의 공개적 자복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교인들이 자복한 죄는 주로 횡령과 절도, 간음, 강간, 위선, 미움, 증오, 질투와 같은 ‘윤리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고, 과거에 훔치거나 횡령한 것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화 새술막교회 윤성근 전도사는 원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과거 인천주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되돌려주어야 했던 회사(정부) 돈을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 ‘양심전’(良心錢)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이 원산 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은 1904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디는 1904년 1월에 개성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2월에 김화 새술막교회와 지경터교회, 4월에 서울 자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여기서도 공개 자복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부흥의 범위는 하디가 속한 남감리회 소속 교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서울 정동제일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0월 평양 지방, 11월 인천 지방에서 연합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곳은 교단이 다른 미감리회 구역이었다. 하디는 인천 지방 연합부흥회를 마치고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가 없는 사이 크램(W. G. Cram)과 캐롤, 하운셀 등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1905년 개성과 원산,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부가 조직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에 따라 1906년 1∼2월 서울과 원산, 평양 등지에서 초교파 연합 부흥회를 개최하여 원산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1906년 8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한 하디는 곧바로 평양에 가서 선교사 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 참석했던 블레어(W. N. Blair)와 그레이엄 리(Graham Lee)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방문해서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 기도로 준비한 끝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개최된 연합사경회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긋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원산 부흥운동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로 이어져 교인들이 회개와 중생, 성화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득하였다. 둘째, 처음에는 남감리회 선교구역인 원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미감리회와 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산되어 초교파 연합운동을 촉진시켰다. 셋째,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양심전’ 같은 윤리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양태가 나타나면서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산 부흥운동이 전개된 시기는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5조약 체결(1905년)로 인한 민족적 위기 상황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정치 ·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적’ 신앙에만 집착함으로써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