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벨라』는 1912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한국인 성직자들을 위해 창간한 라틴어 월간지이다. 내용은 크게 소식란과 학문란으로 구분되며, 과학란과 독자란도 있었다. 등사판으로 발행되다가 1921년 9월호부터 활자본으로 바뀌었고, 1923년 3월호부터는 홍콩에 있던 나자렛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이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는 1923년 10월부터 『타벨라 부록』을 매월 20일에 간행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4월호부터 『타벨라』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다시 발행되면서 『타벨라 부록』은 중단되었다.
1912년 6월 1일 서울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인준 하에 첫 호가 발행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 타벨라가 한국인 형제들에게 유익하기를 생각하며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했고, 드망즈 주교도 “한국인 신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분 스스로 계획한 이 새로운 일에 대해 기꺼운 마음으로 인준한다.”고 하였다. 두 교구장의 인준사를 통해 『타벨라』의 간행이 한국인 신부들을 위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기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타벨라』의 완전한 제호(題號)는 『예수 성심의 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 즉 ‘예수 성심지(聖心誌)’이며, 발행일은 매월 1일이었다. 이 잡지의 제목과 창간일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주보(主保)가 “예수 성심”이고, 6월이 예수성심성월이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타벨라』의 간행에는 기낭(Guinand, 陳普安) 교장 신부, 드브레(Devred, 兪世俊) 교사 신부 및 신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손글씨 주1으로 발행되다가 1921년 9월호부터 활자본으로 인쇄되었다.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교사 신부들이 입대하면서, 1914년 9월부터 주2었다가 1920년 1월에 주3었고, 활자 인쇄 준비로 1921년 1월부터 8월까지 다시 정간되었다.
『타벨라』는 1923년 3월호부터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나자렛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나자렛 인쇄소가 인쇄 시설이 좋은 홍콩에서 원고를 인쇄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낭 신부는 『타벨라』를 홍콩에서 인쇄하면서 한국 교회 소식란을 없앴다. 이에 한국 교회 소식란은 1923년 3월호에 한쪽 분량, 1923년 8월호에 반쪽 분량이 수록되었을 뿐이었다. 대신 1923년 10월부터 한국 교회의 소식을 담은 『예수 성심의 타벨라 부록(Supplementum Tabella SS. Cordis Jesu)』을 매월 20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따로 인쇄하였다. 그리고 홍콩에서 인쇄된 『타벨라』가 오면, 부록과 함께 성직자들에게 발송하였다.
홍콩 인쇄본에 한국 교회 소식란이 사라진 것은, 제호 아래에 ‘한국 성직자용’이라는 주4가 ‘포교지의 성직자용’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한국인 성직자 뿐만 아니라,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하는 극동의 모든 포교지 성직자들에게도 이 잡지를 보급하려던 의도로 보인다.
1933년 4월호부터 다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발행하였고, 한국 교회 소식도 『타벨라』에 재수록되면서 『타벨라 부록』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현재 『타벨라』는 1937년 6월호까지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언제까지 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창간호부터 1937년 6월호까지 소장되어 있다.
『타벨라』의 구성은 크게 소식란과 학문란으로 구분된다. 소식란에는 로마 소식, 세계 교회 소식, 서울대목구 소식, 대구대목구 소식, 백동 소식,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소식 등이 실려 있고, 학문란에는 이단 반박의 역사, 독자의 질문과 편집자의 해답을 실은 토론, 강론 지침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새로운 기술과 발명을 소개하는 일종의 과학란과 독자란도 있다.
소식란에 실린 내용들은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1차 사료이며, 그 밖의 내용들도 신학 분야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