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남경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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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 · 독무덤 관련 생활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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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평양 남경 유적은 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주거지 5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22기, 청동기시대 무덤 20기, 철기시대 무덤 9기가 조사되었는데, 시대와 시기가 다른 유적이 한 장소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융기문토기, 변형 미송리형호, 탄화미, 조, 수수, 콩, 기장 등의 식물 유체 등이 출토되었다.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유물 양상의 변화와 유물의 연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 · 독무덤 관련 생활유적.
개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 대동강 북안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석기시대~ 철기시대의 복합 유적이다.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 주요한 표지를 이루고 있는 유적이다.

내용

1974년 4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의 남쪽, 대동강의 북안에 제방 공사와 관련하여 지표 조사를 하던 중 강물의 침식에 의해 잘려나간 단애면에서 문화층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의 범위는 남북 너비 50m, 동서 길이 1,000m 가량이다(면적 50,000㎡). 처음 조사한 지점이 1지점, 1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450미터 떨어진 지점의 유구군이 제2지점이다. 1지점과 2지점 사이에서는 주거지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1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31호, 32호, 3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15기(110호, 30호, 3336호), 청동기시대 무덤 3기(24호), 철기시대 무덤 9기(19호)가, 2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12호, 1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11호, 13호~16호, 18호, 19호), 청동기시대 무덤 17기(1호 등)가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 전형의 신석기시대 토기 외에 경부에 융기문이 있는 토기 또한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남경 유적 신석기시대 유구가 조사되기 이전에는 청호리금탄리 유적 등에서 소량 출토된 것이 있는데, 이 유적을 조사한 것을 계기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도 동북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융기문토기가 일부 들어와 있었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남경 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군을 토기 비교 등을 통해 궁산 유적을 표지로 하여 설정된 궁산문화 4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구체적인 연대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서 기원전 2,000년기 초로 설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의 청동기문화인 신흥동유형 전형의 팽이형옹과 팽이형호 외에도 여러 기종과 형식의 토기들이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북한 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고 있는 변형 미송리형호 등도 포함되어 있어, 미송리형호를 중심으로 한 요동과 서북한 지역 토기문화의 흐름과 시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남경 유적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유구 간 중복 관계와 토기 및 석기의 기종 구성 및 형식 등을 고려할 때, 기원전 10~5세기의 기간 동안 각 주거군이 일정한 단계를 이루며 변모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경 유적에서 철기시대 유적은 1~7호 옹관묘 등이 있다. 옹관은 대부분 화분형토기를 2옹 또는 3옹식으로 연결하여 횡치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6호의 경우에는 회색승문타날문 옹형토기 1점과 화분형토기 2점을 합구하여 횡치하여 놓았다. 남경 유적의 화분형토기는 대체로 동체가 다소 부른 포탄형을 하고 있는데, 1호 옹관의 막음옹으로 사용한 화분형토기의 경우에는 저부가 평저가 아닌 환저여서 마치 전국연 또는 서한 전기의 환저부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구체적인 편년을 하기는 어려우나, 화분형토기와 회색승문타날문토기의 형태 등으로 보아, 늦어도 기원전 2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남경 유적은 시대와 시기가 다른 유구 간의 중복 관계가 여러 단위 확인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선사문화,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 양상의 변화는 물론 연대를 편년하는 데 중요한 표지 유적이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 32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주거지 10호와 33호가 중복되어 있고, 신석기시대 31호 주거지 남쪽 퇴적층에 청동기시대의 2호 석관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9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8호 주거지가 중복되어 있으며 청동기시대 30호 주거지가 청동기시대의 4호와 10호 주거지에 의해 각각 중복되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 4호 주거지 내부 퇴적층 내에 철기시대의 옹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12호 화재 주거지 내부에 벽체와 지붕 시설을 이루고 있던 탄화목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주거지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 신석기시대 17호 화재 주거지의 벽체에 탄화 기둥과 벽체가 상당수 남아 있어 벽체의 목가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남경 유적 청동기시대 2기층의 3호, 10호, 11호, 16호 주거지에서는 북한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는 변형 미송리형호 또한 출토되었는데, 주거지의 공반 유물과 중복 관계 등과 함께 요동~서북한 지역 미송리형호의 전개 과정 및 편년과 관련하여 중요한 표지 유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외 36호 주거지 등에서 다량의 탄화미, 조, 수수, 콩, 기장 등의 식물 유체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농경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김용간, 석광준,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4)
「기원전 3~1세기 중국 동북과 서북한 지역의 물질문화와 연․진. 한」(오강원, 『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문집: 원사시대 사회문화 변동의 본질』, 한국상고사학회, 2016)
「요동~서북한지역 미송리형호의 지역문화와 사회문화적 함의」(오강원, 『한국상고사학보』 85, 2014)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북한 지역 물질문화의 전개와 고조선」(오강원, 『동양학』 53, 2013)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유형과 연문화와의 관계」(오강원, 『한국상고사학보』 71, 2011)
집필자
오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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