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도(張明道)는 1904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장명도는 3 · 1운동 후부터 1924년경까지 이범윤(李範允) · 진학신(秦學新) 등이 만주 각지에 산재한 의병 출신들을 모아 1919년 4월 조직한 의군부(義軍府)와 1922년 8월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국내에 독립운동을 홍보하는 한편,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시설을 파괴하였다. 일본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귀 아래 뼈 부분에 총상을 입어 큰 흉터로 남았다.
1929년 4월 한국인의 공안 유지, 단일 자치기관을 실현하였다. 한 · 중 양국 연대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부에서 처음에는 제1중대 제1소대장을, 나중에는 참모와 흥서총관(興西總管)을 맡았다. 국민부는 1929년 4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 신민부(新民府) · 참의부(參議府) 등 이른바 삼부 대표들이 지린성〔吉林省〕에 모여 삼부를 해체하고 새로이 조직한 남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국민부는 1929년 9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함으로써 이후 당 · 정 · 군의 체제를 갖추어 갔다.
1932년 이후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 12월 20일 결성되었으며, 조선혁명당의 군대이다. 조선혁명군은 다른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북간도 지방은 물론 국내의 평안도 · 함경도 지방까지 출몰하여 일제 경찰서 등 경비 기관을 파괴하였으며, 기타 소규모 전투 등을 벌여 일제에 충격을 주었다.
1935년 8월경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司令) 한검추(본명 최석용)가 이끄는 부대가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접전하여 적 40여 명을 사살하고 최신 기관총 6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과 함께 흥경현(興京縣)에서 부하 150명을 집결시켜 중국 공비와 합동 항일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34년 8월 양세봉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전사하자, 조선혁명군 제3사 사령으로서 흥경(興京) 왕청문(旺淸門) 등지에서 양세봉의 뒤를 이어 고이허(高而虛) 등과 함께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 병사로서 10여 년간 소대장, 중대장, 참모장 등의 직함을 차례로 거쳤고, 순국 수개월 전에는 조선혁명군 제1로 사령직에 임명되어 복무하였다.
1935년 3월 5일 오전 11시경 랴오닝성〔遼寧省〕 환인현 표자동(豹子洞) 농가에 잠복하여 활동하던 중 환인현 헌병대에게 발각되어 헌병대의 공격을 받고 동료 이영수(李永洙)와 함께 교전 중 순국하였다.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