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철(韓奉喆)은 1898년 3월 2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에서 태어났다. 중등학교 시절 기독교청년회에 입회한 기독교 신자이다.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에서 김경성(金慶星) · 서상석(徐象錫) · 이진규(李盡珪)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군중과 함께 양평우편소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6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기독교계의 장로이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경기도 지단장인 한덕리(韓悳履)의 권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양평 군수, 양평경찰서 형사 등에게 ‘사형집행선고문’ 등을 발송하였다가 양평경찰서에 체포되어 한덕리 · 정경시(鄭慶時) 등 7명과 함께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23년 중국 만주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위원이 되었다. 1924년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에서 유하현(柳河縣) · 반석현 · 화전현(樺甸縣) 등지의 11개 청년 단체 대표 22명이 모여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을 결성할 때 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이 단체는 철저한 계급의식과 공고한 조직적 단결로 남만주 지역의 청년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조직된 청년 단체였다.
1925년 4월 혁청단(革靑團) 선언 강령사건으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일간 감금당하였다. 혁청단은 1923년 12월 21일 홍성하 · 옥순철 · 권태휘 등 30여 명이 서울 종로 중앙예배당에서 조직한 풍속 정화와 무산계급의 문화 향상을 표방한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 단체였다.
1925년 12월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선 해방과 무산 청년의 경제 투쟁과 과학적 사상 보급을 기치로 내세운 신활청년회(新活靑年會)를 조직하고 이석호(李石虎) · 박정현(朴禎賢) 등 6인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다. 신활청년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단체로서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강연회와 신문강독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반석현으로 이주하여 조선인소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재만농민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9년 지린성 목릉현(穆稜縣)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 남만(南滿) 제1구역의 조직부장으로서 남만주 지역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 중국공산당과 연대하여 항일투쟁을 벌였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유격대를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1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32년 지린성 반석현 지역 공산당 책임자로서 지린성 화전현(樺甸縣) 팔도구(八道溝) 일대에서 지하공작을 벌였다.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獨立師)의 결성에 참여하여 군대 내에서 당(黨) 사업에 종사하였고,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의 군수부장을 맡아 환인현(桓仁縣) 본계(本溪) 지역에서 유격대 근거지 창설 사업을 맡아 10여 개의 비밀 숙영소와 주둔지를 건설하였다. 1936년경 옌지현〔延吉縣〕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