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하(尹敞夏)는 1908년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花山面) 율동리(栗洞里)에서 부친 윤주백(尹柱百)과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해남군 현산보통학교(縣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광주군(光州郡) 광주면 금계리(錦溪里)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부친은 한말(韓末)에 보성군(寶城郡) 주사(主事)를 지냈으나, 1910년 국권피탈 이후 귀향하였다.
1928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 같은 학교 5학년의 이경채(李景采)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문건을 작성하여 광주 시내 곳곳에 붙이고, 인근의 중학교와 경찰서에 송부한 것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당하자 학생들은 이에 저항하여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이때 윤창하는 3학년으로, 같은 학년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9년 6월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김상환(金相焕) · 김보섭(金普燮), 광주사범학교의 송동식(宋東植) · 강달모(姜達模), 광주농업학교의 김순복(金順福) 등과 회합하여 독서회중앙부(讀書會中央部)를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여 강달모와 함께 재무위원에 선임되어 회비의 징수 및 기타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후에 일제는 독서회중앙부에 대해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 비밀결사라고 하였다.
학생들은 소비조합(消費組合)을 결성하여 자금 조달에 힘쓰는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 광주농업학교 독서회, 광주사범학교 독서회,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독서회 등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독서회는 1929년 6월 무등산(無等山)에서 김상환 · 김보섭 · 오쾌일(吳快一) 등 22명이 참석하여 결성하였는데, 윤창하는 박기원(朴基源) · 이영범(李翎範) 등과 함께 조사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독서회는 회원들을 5개 조로 나누고, 조별로 책임자를 정하여 연구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조별 책임자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항일 시위에 나섰으며,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0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만세 시위와 관련해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독서회와 관련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으며, 1984년 12월 29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