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룡(曺吉龍)은 1909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으며,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에 다녔다. 광주학생운동으로 재판받을 당시 22세였고,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29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장재성(張載性)이 광주농업학교의 김순복(金順福),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의 송동식(宋東植) · 강달모(姜達模),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김상환(金相焕) · 김보섭(金普燮) · 윤창하(尹敞夏) 등과 회합하여 독서회중앙부(讀書會中央部)를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여 각종 인쇄물 제작과 배포를 담당하는 출판위원에 선임되었다. 독서회중앙부는 1926년 말에 결성된 후 내부에 이반자가 생겨 해산되었던 광주 지역 학생들의 비밀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의 활동을 계승한 조직이었다.
같은 해 6월 조길룡은 김남철(金南哲) · 최정기(崔貞基) 등 광주농업학교생 20여 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회합을 갖고 광주농고 독서회 조직에 앞장섰으며, 동회의 대표 겸 재정부 위원의 일을 맡았다. 교내의 독서회는 3개 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으며, 사회과학 연구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9월에는 장재성 · 김기권(金基權) · 나승규(羅承奎) 등과 함께 소비조합(消費組合)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기금을 모아 문방구점을 개설하여 독서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회원들의 집합 장소로 활용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농업학교생의 가두시위에 앞장서서 활약하였으며, 10일에는 오쾌일(吳快一) · 김남철 · 김홍남(金鴻南) 등과 함께 박석기(朴錫紀)의 집에 모여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 광주사범학교 3개교가 연합한 제2차 시위를 계획하고, “학생 대중 궐기하라, 검거된 사람들을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격문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에 조길룡은 11일 밤 박석기의 집에서 오쾌일 · 이형우(李亨雨)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배포할 격문 2,000여 장을 만들었으며, 이 가운데 일부를 받아 12일 광주농업학교 교실에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학생운동에서의 시위로는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0년 2월에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한, 독서회 운동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고, 1931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8 · 15광복 이후 광주 남구 주월동 광복촌에 거주하였으며, 1991년 3월 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