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독서회를 조직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주요 활동
같은 해 6월 조길룡은 김남철(金南哲) · 최정기(崔貞基) 등 광주농업학교생 20여 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회합을 갖고 광주농고 독서회 조직에 앞장섰으며, 동회의 대표 겸 재정부 위원의 일을 맡았다. 교내의 독서회는 3개 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으며, 사회과학 연구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9월에는 장재성 · 김기권(金基權) · 나승규(羅承奎) 등과 함께 소비조합(消費組合)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기금을 모아 문방구점을 개설하여 독서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회원들의 집합 장소로 활용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농업학교생의 가두시위에 앞장서서 활약하였으며, 10일에는 오쾌일(吳快一) · 김남철 · 김홍남(金鴻南) 등과 함께 박석기(朴錫紀)의 집에 모여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 광주사범학교 3개교가 연합한 제2차 시위를 계획하고, “학생 대중 궐기하라, 검거된 사람들을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격문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에 조길룡은 11일 밤 박석기의 집에서 오쾌일 · 이형우(李亨雨)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배포할 격문 2,000여 장을 만들었으며, 이 가운데 일부를 받아 12일 광주농업학교 교실에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학생운동에서의 시위로는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0년 2월에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한, 독서회 운동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고, 1931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8 · 15광복 이후 광주 남구 주월동 광복촌에 거주하였으며, 1991년 3월 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단행본
- 『독립운동사자료집』 13(국가보훈처, 1986)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독립문화사, 1965)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수호회, 1956)
판결문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31. 6. 13.)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30. 10. 18.)
-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30. 2. 2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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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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