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1919년 훈춘국민회에 참여하고, 이후 1931년까지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
사망 연도
1933년 5얼 17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2010)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광삼은 일제강점기 1919년 중국 지린을 무대로 활동하던 훈춘국민회에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지린성 일대와 함경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1919년 훈춘국민회에 참여하고, 이후 1931년까지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신광삼(申光三)은 1894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났다.

주요 활동

1919년 중국 지린을 무대로 활동하던 훈춘국민회〔琿春國民會〕에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훈춘국민회는 1919년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사도구(四道溝)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한민단, 훈춘한민회 또는 훈춘대한국민회라고도 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및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하였다.

훈춘국민회는 독립선언, 모병 실행, 교육 보급 등의 3대 강령을 내세우고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초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다. 주요 간부로는 이명순 · 황병길 · 윤동철 · 최경천 등이었으며,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와 연합하여 '대한국민회'로 발전하였다.

1920年 4월부터 1931년 12월까지 중국 지린성과 함경북도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던 신광삼은 훈춘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3년 5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독립유공자공훈록』 19(국가보훈처, 2011)

신문

『조선일보』(1932. 7. 4.)
『동아일보』(1932. 7. 3.)
집필자
황선익(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