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하여 이후 대한중석(지금의 대구텍) 사장,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 초대 사장, 자유민주연합 총재 등을 역임한 군인, 기업가, 정치인이다.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한 뒤 한국의 철강산업 확립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 제11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제13대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 1997년 지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 등을 지냈다. 이후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박태준(朴泰俊)은 1927년 9월 29일(음력) 경상남도 동래군(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와세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8 · 15광복이 되어 2학년만 마치고 귀국하였다.
1948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육군 제1여단 제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는 5사단 작전참모, 1954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 등을 지냈다. 1956년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여 8월에 수료하였고, 그 직후 국가 정책 수립을 담당하는 제2 과정의 책임교수로 부임하였다. 1957년 25사단 참모장, 71연대장 등을 거쳐 1961년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하던 중 5 · 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朴正熙)의 비서실장에 이어 재정경제위원회 상공 담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당시 박정희 의장에게 대일 막후 접촉의 적임자로 박철언, 야기노부오〔八木信雄〕(일제 말 전라도지사를 지낸 지한파 일본인), 이용희 교수 등을 추천하였고, 이들은 박정희 · 이케다 회담이 개최될 수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국영기업 대한중석(지금의 대구텍) 사장,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4년에는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한일회담 촉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종합제철건설 계획이 수립되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과의 협정이 체결된 후 1967년 9월, 종합제철사업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이 선정되었다. 정부는 제철 사업을 추진할 전담 기구인 종합제철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박태준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 교섭의 주체로 1969년 1월 31일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KISA와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면서, 그해 5월 일본 철강업계를 대상으로 협력 여부를 타진하는 방안에 대해 김학렬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정부 내에서도 KISA의 대안으로 일본을 고려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8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8월 말 한일 각료 회담에서 종합제철건설 지원과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원칙이 합의되기까지 일본 정재계의 숨은 리더로 불리는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라인을 활용하여 일본에 대한 막후 교섭자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이 제공한 차관과 기술로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되었고, 1973년 6월 9일 포항 1고로가 완성되었다. 이후 1992년까지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건설이 완성되었다. 1981년 초대 회장에 취임한 박태준은 1992년 포항제철 회장직을 사퇴하였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축구 마니아로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하기도 하였다.
한편, 12 · 12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유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의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 후 제13대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며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하여 당 운영을 맡으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 대립하였고, 문민정부 출범 직전에 포항제철 회장직과 제14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3년 국세청은 포항제철에 대한 세무조사를 통해 박태준을 검찰에 고발 조치하였고, 재판 도중인 1995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출국하여 해외를 유랑하였다. 1997년 5월 초 귀국하여 같은 해 7월 24일에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포항시 북구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1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당 총재로 추대되었고, 김대중 · 김종필 간 연합(DJP연합)을 통해 김대중의 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지원하였다.
2000년 1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지만, 부동산 명의 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2000년 5월 국무총리 사임 이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였고, 이후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 평소 지병으로 앓고 있던 폐질환이 악화되어 12월 13일 84세로 사망하였다. 충무무공훈장, 금성화랑 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으며, 2011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2012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