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은 1960년 고려대학교 학생특위 위원장으로 4·19혁명을 주도하였다. 4·19세대 대표 주자로 정계에 입문하여 1967년 제7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992년 14대까지 7선 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신민당 사무총장, 통일민주당, 통합민주당 총재를 지냈으며, 13대 국회에서 5공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한나라당 부총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을 지냈다.
1937년 7월 25일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민(一民)이다. 1944년 청하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부산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하였다. 1960년 상과대학 학생위원장 자격으로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에 참여하여 학생특위 위원장을 맡아 4 · 19혁명을 주도하였다.
4 · 19혁명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대한민주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부산시당 청년국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정당 활동에 나섰다. 1961년 민주당 부산시당 청년국장을 사임하고 태광산업에 입사해 생활하다가 민주당의 영입 제안을 받고 1967년 신민당 비례대표로 제7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29살의 청년 정치인으로 의정 활동을 시작하며 4 · 19, 6 · 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제8~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1976년에는 신민당 최연소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79년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결선투표에서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김영삼 총재 체제 출범에 기여하였으며, 부총재에 피선되었다.
1979년 12 · 12군사반란 직전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문제연구소장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초청으로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취소되고 1980년 1월에야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1984년 11월 30일 제3차 해금으로 구정치인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면서 신당 창당이 본격화되자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한민주당 창당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 아래서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86년 6월 24일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개헌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12월 이민우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내각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에 김영삼 · 김대중 등과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1987년 2월 13일 김영삼 · 김대중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개헌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이른바 ‘선택적 국민투표’를 제의하였다. 야당 내 갈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1987년 4월 김영삼 · 김대중은 신한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90명 중 자신들을 지지하는 74명의 국회의원을 탈당하게 한 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은 민주사상연구회 소속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였지만 통일민주당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이 4 · 13호헌조치(四一三護憲措置)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여 15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나, 통일민주당의 대권 후보를 놓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립하였고, 김대중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기택은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고, 통일민주당 후보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이어 13대 국회 개원 후 구성된 ‘제5공화국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 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89년에는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도 겸임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시 합류를 거부하고 소장파 의원들과 민주당(꼬마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총재로 선출된 후 평화민주당과의 야권 통합을 추진하여 1991년 김대중 · 이기택 공동대표 체제의 통합민주당을 성사시켰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으로 선출되었으며, 14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선거에서 민주당의 공동대표로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12월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후 치러진 1993년 3월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단독 대표로 선출되었다. 1994년 12 · 12군사반란 주모자 기소 투쟁을 주도하였다.
1995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새한국당과 국민회의와의 통합이 선언되었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새한국당 이종찬 대표가 상임고문, 국민회의 김근태 공동대표가 부총재를 맡았다. 같은 해 7월 13일 김대중의 정계 복귀 선언 이후 민주당은 분당되어 동교동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9월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1997년 7월 경상북도 포항북 보궐선거에서 박태준 후보에게 패하였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고, 한나라당의 공동선대위 의장을 맡았다. 1998년 조순 총재의 사퇴로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을 역임하였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부산 연제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2001년부터 ‘해외 한민족 교육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해외 한민족 우리 역사 알리기 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 2007년 17대 대선에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고, 2008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야당사』(백산서당, 1987),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새로운사람들, 1997) 등이 있다.
1963년 건국포장,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