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화 ()

의생활
의복
주문을 받지 않고 일정한 기준 치수에 맞추어 미리 만들어 판매하는 신발.
의복
재질
고무, 나일론 등
제작 시기
연중 수시(기성화 제조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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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성화는 주문을 받지 않고 일정한 기준 치수에 맞추어 미리 만들어 판매하는 신발이다. 1880년대 개화파(開化派) 인물들과 외교관들에 의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된 구두는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 군화와 맞춤 제작되는 고급 수제화 형태로 도입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광고를 통해 대중들까지 기성화를 착용하게 되면서 국내 기성화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였고, 1960년대에 금강제화산업사가 기계 공정을 도입하여 대량 생산을 통한 기성화 시장을 열고 수출까지 이뤄 냈다.

정의
주문을 받지 않고 일정한 기준 치수에 맞추어 미리 만들어 판매하는 신발.
연원

신발 제작은 18세기 중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화되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1846년(헌종 12) 재봉틀의 등장으로 제화(製靴)는 공장 환경으로 전환되고, 재료, 접착제 및 제조 공정의 다양한 발전으로, 1910년대에는 수작업으로 힘들게 꿰매던 밑창은 대량 생산되어 기계로 접착될 수 있는 무봉제(無縫製) 신발 제화 공정이 개발되어 본격적인 기성화(旣成靴) 시대가 열렸다. 1596년(선조 29) 뮌헨에서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화 회사인 에드 마이어(Ed Meier)는 20세기 초에 고품질 기성화를 출시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개항(開港)과 함께 각종 양품(洋品)들과 서양복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구두도 같이 들어왔다. 기성화로서 구두의 제작은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1895)으로 서양식 군복과 경찰복이 도입되면서 신발을 서양식 구두로 변경함에 따라 조선 정부가 광교에 군화창(軍靴廠)을 만들어 군화를 대량 생산하도록 한 것에서 비롯된다.

형태 및 용도

신발은 형태 및 용도, 디테일, 장식, 굽(heel), 토(toe)에 따라 다양한 분류 기준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펌프스(pumps), 슬리퍼(slipper)와 뮬(mule), 이브닝 슈즈(evening shoes), 스틸레토 힐(stiletto heel), 샌들(sandals), 클로그(clogs)와 플랫폼 슈즈(platform shoes)과 웨지 힐(wedge), 브로그(brogues), 로퍼(loafers)와 모카신(moccasins), 부츠(boots), 스니커즈(sneakers)의 열 가지로 분류한다. 신발은 형태, 재질 및 치수에 따라 다른 생산 방식이나 공정이 필요하다. 보통 기성화를 제작하는 방법으로는 갑피(upper)와 밑창(sole)을 접착제로 붙이는 것과 실로 봉합하는 것, 고무창의 가황압착, 합성수지창의 사출 성형 등이 있다. 밑창을 생산하는 라인은 사출 성형 장비를 이용하므로 장치 산업의 특징을 갖는 반면, 갑피 생산 라인은 작업자가 재봉틀을 이용해 재단기로 자른 부품을 결합하는 수작업 공정을 행한다.

변천 및 현황

1880년대 개화파(開化派) 인물들과 외교관들에 의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된 구두는 대량 생산으로 제작되는 기성품 군화와, 맞춤 제작으로 이루어지는 고급 수제화라는 두 가지 형태로 도입되었다. 1920년대의 양복과 함께 구두는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의 필수품으로, 특히 신여성(新女性)에겐 패션 아이템이자 신분을 과시할 수 있는 도구였다. 하이힐과 같은 구두를 착용한 신여성은 관심의 대상이자 여성 혐오의 대상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신여성을 허영과 사치, 퇴폐와 타락의 이미지로 낙인찍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신세대 남성 지식인은 이러한 신여성에게 냉소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는 이중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1920년대 이후 수제화는 종로, 기성화는 명동에서 판매되었고 193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비쌌던 수제화를 신지 못했던 일반 서민이 기성화 구두를 착용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기성화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펌프스와 샌들, 옥스퍼드 슈즈, 장화와 단화, 목구두, 하이힐, 칠피 구두와 샌들, 새들(saddle) 구두, 페니 로퍼(penny loafer) 등 다양한 신발 종류들이 등장하고 발등 앞부리에 꽃무늬나 리본, 끈 장식을 단화에 액세서리를 부착하는 등 신발의 디자인이 다양화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고무신의 인기로 전국에 73개 공장이 운영되어 고무신이 기성화로서 생산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육이오 전쟁을 거치면서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신발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주로 고무를 활용한 혁제(革制)  운동화 산업은 부산, 살롱화로 대표되는 제화 산업은 서울이 중심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기성화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1954년 설립된 금강제화산업사(金剛製靴産業社)가 기계 공정을 도입하여 대량 생산을 통한 기성화 시장을 열었는데, 기성화의 대량 생산 체제가 확립되고 해외 시장에 고무화를 수출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신발 생산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때부터는 제화 기술의 발달과 신발 소재의 개발로 합성 피혁이 신발 소재로 개발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남녀 구분 없이 끈을 묶는 스타일, 농구화, 정구화, 축구화 등의 운동화와 플랫폼 슈즈, 부츠 등 보다 다양한 스타일이면서 견고한 기성화들이 출시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스포츠웨어의 영향으로 낮은 굽의 구두와 스니커즈가 유행하였는데, 2000년대에는 직장인들을 위해 정장 구두에 스니커즈의 편안한 창을 붙인 새로운 정장 신발이 등장하고 금강(金剛), 에스콰이어에서 이러한 신발 브랜드를 론칭하였다. 그러나 유명 브랜드와 오이엠(OEM)을 하는 방식을 통해 다국적 기업에 의존하여 종속적으로 성장하였던 한국의 신발 산업은 경제 공간의 세계화, 저임금 노동력에 기초한 신흥 공업국 제조업체들의 시장 진입과 기술 추격으로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제화업계는 산업 인프라 구축 및 최첨단 소재와 기능적 구조를 결합한 디자인 개발과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는 시스템 구축, 마케팅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기성화를 신는다는 것은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고 근대적 사고방식을 채택했음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1920년대 이후, 제화점에서 생산된 신발들은 근대 모던의 상징이었던 양장을 입은 모습을 완성시켜 주는 중요한 패션 품목으로서 격식에 맞는 취향과 우아함이라는 상징을 갖고 변화 발전하였고, 1930년대부터 시작된 기성화의, 대중화와 다양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디자인의 신발을 즐길 수 있는 등, 패션의 실용화 및 민주화를 유도하였고, 나아가 T.P.O에 따른 패션을 채택하고, 광범위하게 유행이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기계 공정 도입에 의한 기성화 대량 생산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신발 생산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임종국, 『한국인의 생활화 풍속(상)』(아세아문화사, 1995)
고부자, 『우리 생활 100년‧옷』(현암사, 2001)
서울시시정개발연구원, 『서울 20세기 생활, 문화 변천사』(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1)
금기숙 외 9인, 『현대 패션 110년』(교문사, 2012)
김선아, 『슈즈디자인 개론』(한국슈즈패션인재개발원, 2016)
보그 코리아, 『mode & moments: 한국 패션 100년』(보그 코리아 편집부, 2016)
서울역사편찬원, 『구두 한 켤레에 일생을 담다: 염천교의 구두장인들』(학고방, 2021)
하지수 외 7인, 『현대사회와 패션』(교문사, 2022)

논문

김은영·이미숙, 「패션 컬렉션의 신발 디자인 연구: 2001년 S/S-2008/09SUS F/W 파리·밀라노·뉴욕·런던 컬렉션을 중심으로」(『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 10-1,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0)
G.B. Sutton, 「The Marketing of Ready Made Footwear in the Nineteenth Century: A Study of the Firm of C. & J. Clark 1」(『Business History』 6-2, 2006)

인터넷 자료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6883)

기타 자료

‘제화업계의 ‘대왕’ 박덕유’(『서울신문』, 2020.08.20.)
‘정조보다 명품백 원했던 여성들’(『스포츠경향』, 2014.12.31.)
‘현모양처에서 페미니스트까지 ‘신여성 도착하다’ 전’(『경향신문』,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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