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당자(燕貿唐字)는 1790년과 1791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수입한 목활자(木活字)를 지칭하는 것으로, ‘무영전취진판(목활자)’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서는 이 연무당자를 토대로 하여 생생자(生生字) 목활자를 만들고, 또 생생자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정리자(整理字) 금속활자를 주성(鑄成)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정조(正祖, 1752~1800)는 문예 부흥 정책에 치중하여 역대 선왕(先王)들의 인쇄 정책을 계승 ·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정조는 중국 청나라의 흠정무영전취진판정식(欽定武英殿聚珍版程式)을 도입함과 동시에, 1790년(정조 14)과 그 이듬해인 1791년(정조 15)에 두 차례에 걸쳐서 청나라의 목활자(木活字)를 수입한다. 연무당자(燕貿唐字, 연무목자(燕貿木字))가 바로 그것이다.
1814년에 작성된 『판당고(板堂考)』 주자소(鑄字所)에 방치된 장서(藏書)와 책판(冊版) · 활자 등을 점검하고, 그 결과 및 활자 관리 지침을 기록한 책의 기록에 의하면, 1790년과 1791년에 수입된 연무당자의 수량은 각각 ‘대자(大字) 11,500자, 소자(小字) 11,450자(庚戌貿來, 1790)’, ‘대자 9,600자와 소자 9,900자(辛亥貿來, 1791)’라고 한다. 그 제작 활자의 재료는 대추[棗]나무이며, 활자의 규격은 ‘대자[腰高字] 1.06×1.44×1.99cm(세로×가로×높이), 보통자 1.09×1.41×0.82cm)’이다. 이 연무당자는 바로 ‘무영전취진판(목활자)(武英殿聚珍版(木活字))’를 말하는 것이다.
‘취진판’과 관련한 상세한 사항은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版程式)』에 잘 나타나 있다. 『무영전취진판정식』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 위하여 목활자를 제작하고, 목활자의 제작 방식에 판화를 곁들여 설명한 책으로, 1776년에 중국의 김간(金簡, ?~1794)이 편찬한 책이다. 김간은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의 후손으로, 중국에서 목활자 인쇄의 연구 개발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의 저서 『무영전취진판정식』에 나타나는 ‘인쇄 공정(組版)의 치밀한 개량(改良)’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취진판은 ‘활자의 제작 방법 측면에서 글자의 새김이 매우 정교하고 글자의 획이 균정(均整)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글자의 배열 또한 정연한 식자 및 조판’이라는 측면에서 종래의 ‘활자 인쇄 방법’보다 진일보(進一步)한 인쇄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취진판 용례(用例, 程式)의 영향을 받아 활자판(活字版)의 일반적인 뜻으로 ‘취진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792년 정조(正祖)는 1790년부터 수입된 위의 연무당자의 목활자 제작법과 중국에서 간행된 『강희자전(康熙字典)』(1716)의 글자체를 본떠서, 드디어 생생자(生生字) 목활자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생생자를 글자본[字本]으로 하여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의 주조(鑄造)를 완성하였다. 1796년에 완성된 정리자는 정조가 계획한 활자 개량(改良)의 결과물이자, 정조를 상징하는 활자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리자는 중국 『강희자전』의 글자체를 근간으로 하였고, 정조는 이 정리자 주조(鑄造)를 위하여 중국에서 목활자 ‘연무목자’를 들여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정리자를 주조하는 데 관여한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정조와의 대화에서, “정리자를 조판하는 노고를 크게 줄일 수 있으니, 임금[正祖]께서 편찬한 여러 서적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하여, 초야의 선비들도 모두 읽게 하면 유교를 널리 보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정리자는 한국 금속활자 인쇄에 있어서, 그 조판의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량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연무당자는 1790년과 1791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수입한 목활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무영전취진판(목활자)’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본받아 생생자 목활자를 만들고, 또 생생자를 자본으로 하여 정리자 금속활자를 주성(鑄成)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