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동교회가 운영하는 승동소학교와 정신여학교를 다녔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9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도쿄 여자 유학생들의 모임인 여자흥학회(女子興學會)에 참여하였다. 흥학회는 1920년 7월 황신덕(黃信德), 유영준(劉英俊) 등의 주도로 조선 여성을 계몽하기 위한 여학생강연단 8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한소제도 이에 참여하여 경성, 부산, 평양 등지에서 강연하였다.
1922년 12월 홋카이도[北海道] 농과대학에 다니던 신동기(申東起)와 결혼하였다. 1923년 12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유영준 등과 함께 졸업하였는데, 전체 졸업생 120명 중 조선인은 3명뿐이었다. 어학과 음악에도 소양이 깊었다고 한다. 귀국하여 정신여학교에서 생리위생을 가르쳤고, 곧이어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1926년 2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알비온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였고, 이어 워싱턴대학 의학부 소아과를 다녔다. 1929년 2월 남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해 4월 남편 고향인 전주에서 전주대동의원을 개업하였고, 5월 전주유치원 등이 개최한 위생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1934년 4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될 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7년 6월 경성영아보건회장 노선복(魯仙福) 주도로 동대문병원 부설 경성탁아소가 준공되자 주치의를 맡았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육아 및 생활개선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신문 기고를 하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1941년 10월 4일 『매일신보』가 주최한 여성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결성을 위한 부인간담회에 참석하였다. 1942년 5월 26일부터 5일간, 조선 징병제 실시와 관련하여 어머니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공덕감리교회에서 열린 ‘어머니를 위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43년 안암동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해방 후 1946년 4월 결성된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에 참여하였다. 애국부인회 후생부의 사업으로 걸스카우트 결성을 앞장서 추진하여, 1946년 4월 ‘소녀척후대(少女斥候隊)’로 미군정의 승인을 받았다. 5월 조선소녀단(朝鮮少女團)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한소제는 간사장을 맡았다. 회장은 김성실(金誠實), 부회장은 송인실(宋仁實)이었다. 1946년 10월 미국 걸스카우트연맹의 초청으로 문교부 교화국 담당자 이계숙(李桂淑)과 함께 미국에 가 6개월간 걸스카우트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1947년 7월 돈암동에서 삼봉의원을 개업하였다. 1948년 걸스카우트 간사장을 사임하였고, 1949년 5월 대한부인회 서울지부 회장, 1950년 4월 서울YWCA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3년에는 대한소녀단 중앙연합회 이사로 여러 직책을 거쳤다. 196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997년 3월 4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