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내선결혼은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선결혼은 대개 일상에서의 접촉과 자유연애를 통해 맺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모든 내선결혼을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촉진하는 동화정책의 수단이라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내선결혼의 실제 양상은 일제의 기대와 달랐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불화를 드러내고 일본인 여성을 조선인화시켰을 뿐 아니라, 전시체제기에는 일본 본토에서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이 급증한 것이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인 동화정책과 내선결혼 장려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
내용
내선결혼은 대개 일상에서의 접촉과 자유연애를 통해 맺어졌다. 당시에는 학업 또는 취업을 위해 남성이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일본에서는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조선에서는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이 맺어졌다. 농촌보다는 도시에서, 상류층보다는 중하류층에서 다른 민족의 이성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정략결혼을 하기도 했고, 여성 인신매매 또는 성범죄가 내선결혼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혹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내선결혼 부부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모든 내선결혼을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촉진하는 수단이라고 선전하였다. 1910년대부터 내선결혼 제도를 마련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들어 내선결혼을 내선융화의 상징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사랑으로 맺어진 내선결혼 가정과 그 자녀들이 양 가족과 민족에 사랑을 연쇄시켜 민족 간의 결합을 공고히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모범을 보인다면서, 1920년 영친왕 이은(李垠)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황실 '내선결혼'을 전격 단행하였다.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에는 내선결혼을 조선인이 가정에서부터 일본 문화를 익히고 혼혈을 통해 핏줄까지 일본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내선일체의 수단이라고 선전하였다. 일제의 동화정책과 내선결혼 장려 정책은 조선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전시체제기 일제는 내선결혼 장려 정책에 회의적으로 변했다. 1920~30년대 내선결혼이 증가하면서 민족 간 융화 뿐 아니라 불화를 드러내고 일본인 여성이 남편과 시가의 가풍에 따라 반대로 조선인화된 사례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내선결혼을 빠르게 늘리기보다 모범적 가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1939년부터 조선인이 일본으로 집단 노무동원되면서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이 급증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 제국 남성과 식민지 여성이 아니라 식민지 남성과 제국 여성 사이의 결혼이 내선결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혈통적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 조선인 동화정책과 내선결혼 장려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였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이정선, 『'동화'라는 양날의 검: 일제강점기 '내선결혼' 정책과 그 실상』(동북아역사재단, 2023)
- 이정선, 『동화와 배제: 일제의 동화정책과 내선결혼』(역사비평사, 2017)
논문
- 이정선, 「일제의 '내선결혼' 정책」(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5)
주석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