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경기도 양주목 서산(西山, 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운서(雲瑞), 호는 희당(希堂) · 삼희당(三希堂)이다. 아버지는 윤희오(尹羲五)이고,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이다.
서응순(徐應淳), 박홍수(朴弘壽)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1878년 화서학파의 대가인 김평묵(金平黙, 18191891) 문하에서 위정척사파 학풍을 익혔다. 이어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함으로써 김평묵 - 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890년 아버지의 육촌 형제인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율리의 석곡촌(石谷村)으로 이거하였다. 석곡서사(石谷書社)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가 몇 년 후 남포군 신안면 한천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로 이주하였다. 1898년에는 충청 지역 유학자와 화서학파 인물 160여 명의 찬동을 얻어 집성당(集成堂)을 건립하였다. 집성당에는 ‘양이(攘夷)’와 ‘척사(斥邪)’의 정신으로 천하대세에 대적하겠다며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셨다.
윤석봉은 화서학파의 주요 이념인 존화양이론을 계승하여 일본과 서양 문물을 철저히 배척하는 척사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서양과의 통화불가론(通和不可論), 왜와의 교통불가론, 청국과의 교통불가론 등 3가지 불가론을 주장하며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화서학파 문인들이 의병으로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민종식(閔宗植) 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참모를 맡았으며, 민종식을 대신하여 고종에게 상주문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홍주성이 함락되고 나서 일본군에게 체포된 그는 홍주 감옥에 갇혔다가 서울의 일본군 감옥인 경성수금장에 구금되었다. 일본군이 주먹밥을 주자, 죽을지언정 이 밥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였고, 신문 때는 “죽는 것은 진실로 내가 원하는 바이니, 무엇이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맞섰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집성당에 고유문을 바치고, 500년 종사가 무너졌음을 통곡하였다. 그해 11월 6일 사망하였다.
1906년 2개월에 걸친 의병 활동을 되짚어 『홍옥경부양처합기 병오(洪獄京部兩處合記 丙午)』를 저술하였다. 또 홍주성이 함락되는 상황을 「홍주함성시작(洪州陷城時作)」이란 시로 읊기도 하였다.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