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개항기~대한제국기,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유학자. 항일운동가.
인적사항
주요 활동
1890년 아버지의 육촌 형제인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율리의 석곡촌(石谷村)으로 이거하였다. 석곡서사(石谷書社)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가 몇 년 후 남포군 신안면 한천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로 이주하였다. 1898년에는 충청 지역 유학자와 화서학파 인물 160여 명의 찬동을 얻어 집성당(集成堂)을 건립하였다. 집성당에는 ‘양이(攘夷)’와 ‘척사(斥邪)’의 정신으로 천하대세에 대적하겠다며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셨다.
윤석봉은 화서학파의 주요 이념인 존화양이론을 계승하여 일본과 서양 문물을 철저히 배척하는 척사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서양과의 통화불가론(通和不可論), 왜와의 교통불가론, 청국과의 교통불가론 등 3가지 불가론을 주장하며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화서학파 문인들이 의병으로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민종식(閔宗植) 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참모를 맡았으며, 민종식을 대신하여 고종에게 상주문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홍주성이 함락되고 나서 일본군에게 체포된 그는 홍주 감옥에 갇혔다가 서울의 일본군 감옥인 경성수금장에 구금되었다. 일본군이 주먹밥을 주자, 죽을지언정 이 밥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였고, 신문 때는 “죽는 것은 진실로 내가 원하는 바이니, 무엇이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맞섰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집성당에 고유문을 바치고, 500년 종사가 무너졌음을 통곡하였다. 그해 11월 6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논문
- 김상기, 「윤석봉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5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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