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고려"
검색결과 총 392건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고려 (高麗)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시대구분론은 역사 진행상 동질성이 강한 특정 시기를 앞뒤의 시기와 차별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나 이론을 말한다. 다만, 어떤 잣대를 사용해 보는가에 따라 구분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규모의 시대구분으로는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현대(contemporary)의 삼분법을 들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진화과정에서 근대가 매우 강력한 변화의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사에서도 시대를 가장 크게 구분할 때 전근대와 근현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양분한다.
시대구분론 (時代區分論)
시대구분론은 역사 진행상 동질성이 강한 특정 시기를 앞뒤의 시기와 차별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나 이론을 말한다. 다만, 어떤 잣대를 사용해 보는가에 따라 구분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규모의 시대구분으로는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현대(contemporary)의 삼분법을 들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진화과정에서 근대가 매우 강력한 변화의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사에서도 시대를 가장 크게 구분할 때 전근대와 근현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양분한다.
고려연방제는 북한이 1960년부터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남과 북에 현존하는 상이한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방통일정부 수립 후 남북 양 지역정부가 내정을 맡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가 맡는 1민족·1국가·2제도·2정부 형태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데 주한미군 철수 등 무리한 선결조건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서독 주도하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 후, 흡수통일 방지를 위해 ‘완성형 연방제’에서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를 시도해오고 있다.
고려연방제 (高麗聯邦制)
고려연방제는 북한이 1960년부터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남과 북에 현존하는 상이한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방통일정부 수립 후 남북 양 지역정부가 내정을 맡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가 맡는 1민족·1국가·2제도·2정부 형태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데 주한미군 철수 등 무리한 선결조건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서독 주도하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 후, 흡수통일 방지를 위해 ‘완성형 연방제’에서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를 시도해오고 있다.
합천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의상의 법손 순응이 화엄사상을 펴고자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사찰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각은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건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 해인사 (伽倻山 海印寺)
합천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의상의 법손 순응이 화엄사상을 펴고자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사찰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각은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건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진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만주족 등으로 불렸다.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세웠다. 16∼17세기, 누르하치[奴爾哈齊]가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여진 (女眞)
여진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만주족 등으로 불렸다.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세웠다. 16∼17세기, 누르하치[奴爾哈齊]가 만주 지역의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고려시대 때, 시중을 역임한 이제현이 제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1357년에 편찬한 역사서.
사략 (史略)
고려시대 때, 시중을 역임한 이제현이 제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1357년에 편찬한 역사서.
식목도감은 고려시대의 법제회의기관이다. 고려는 당제를 모방해 2성6부의 중앙관제를 정비하면서 별도로 독자적인 두 개의 회의기관을 만들었다. 하나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도병마사이고, 또 하나는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이었다.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더불어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기구였는데 두 기관은 정치의 부침에 따라 경쟁관계 속에서 관장 업무가 변화하면서 국정최고회의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말 식목도감은 무력화하여 부정 관리에 대한 탄핵을 담당하는 식목녹사 기능만 유지하다가 조선초에 의정부에 흡수되었다.
식목도감 (式目都監)
식목도감은 고려시대의 법제회의기관이다. 고려는 당제를 모방해 2성6부의 중앙관제를 정비하면서 별도로 독자적인 두 개의 회의기관을 만들었다. 하나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도병마사이고, 또 하나는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이었다.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더불어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기구였는데 두 기관은 정치의 부침에 따라 경쟁관계 속에서 관장 업무가 변화하면서 국정최고회의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말 식목도감은 무력화하여 부정 관리에 대한 탄핵을 담당하는 식목녹사 기능만 유지하다가 조선초에 의정부에 흡수되었다.
사심관은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또 공신들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아직 지방관 파견이 여의치 않던 때여서 사심관은 기인제도와 함께 지방 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면서 사심관이 민호와 노비를 가로채 사욕을 채우는 등 폐단이 심하여 1318년(충숙왕 5)에 폐지되었다.
사심관 (事審官)
사심관은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이다. 935년(태조 18)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또 공신들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다스리게 한 데서 비롯하였다. 아직 지방관 파견이 여의치 않던 때여서 사심관은 기인제도와 함께 지방 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면서 사심관이 민호와 노비를 가로채 사욕을 채우는 등 폐단이 심하여 1318년(충숙왕 5)에 폐지되었다.
고려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하였던 고려의 풍습.
고려양 (高麗樣)
고려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하였던 고려의 풍습.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후기 제29대 충목왕 당시 건립한 석조 불탑.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후기 제29대 충목왕 당시 건립한 석조 불탑.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고려후기 화강암으로 건조한 다각다층 불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平昌 月精寺 八角 九層石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고려후기 화강암으로 건조한 다각다층 불탑.
조물성전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싸움이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려에 참패했다. 그 후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2차 전투에 나섰고, 고려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이 전투의 결과 경상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조물성전투 (曹物城戰鬪)
조물성전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싸움이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려에 참패했다. 그 후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2차 전투에 나섰고, 고려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이 전투의 결과 경상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이의민 (李義旼)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저화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사용된 지폐이다. 고려 말인 1390년(공양왕 3)에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제작된 저화는 나라의 혼란으로 인해 곧 폐기되고 실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왕조에 들어선 1401년(태종 1)에 저화를 법화로 유통할 것을 결정하였고, 이를 담당할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여 저화의 인조와 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지만 저화 유통은 많은 반발에 부딪혔고, 사용과 중지를 반복할 정도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저화 (楮貨)
저화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사용된 지폐이다. 고려 말인 1390년(공양왕 3)에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제작된 저화는 나라의 혼란으로 인해 곧 폐기되고 실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왕조에 들어선 1401년(태종 1)에 저화를 법화로 유통할 것을 결정하였고, 이를 담당할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여 저화의 인조와 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지만 저화 유통은 많은 반발에 부딪혔고, 사용과 중지를 반복할 정도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조봉암 (曺奉岩)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왕건 동상은 951년에 제작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 조각상이다.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개경의 봉은사 진전(眞殿)에 안치되어 연등회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렸다. 고려 망국 이후 1429년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는데, 1992년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으로 왕건의 실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동명왕 숭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의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체상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계통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고려의 황제제도를 실증하는 유물로 중요하다.
왕건 동상 (王建 銅像)
왕건 동상은 951년에 제작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 조각상이다.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개경의 봉은사 진전(眞殿)에 안치되어 연등회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렸다. 고려 망국 이후 1429년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는데, 1992년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으로 왕건의 실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동명왕 숭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의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체상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계통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고려의 황제제도를 실증하는 유물로 중요하다.
고려 후기의 문신, 민지가 고려 왕조에 관하여 1317년에 저술한 역사서.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고려 후기의 문신, 민지가 고려 왕조에 관하여 1317년에 저술한 역사서.
공녀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원나라와 명나라의 요구로 국내에서 선발되어 원·명나라에 보내진 부녀와 처녀이다. 1274년(원종 15)에 몽골의 요구로 시작된 공녀 차출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80년간 50여 회 이상 이루어졌다. 원의 지속적인 공녀 요구로 고려에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고, 원에서는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공녀 요구는 명의 건국 후에도 잠시 이루어졌으나,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녀 (貢女)
공녀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원나라와 명나라의 요구로 국내에서 선발되어 원·명나라에 보내진 부녀와 처녀이다. 1274년(원종 15)에 몽골의 요구로 시작된 공녀 차출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80년간 50여 회 이상 이루어졌다. 원의 지속적인 공녀 요구로 고려에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겼고, 원에서는 고려풍(高麗風)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공녀 요구는 명의 건국 후에도 잠시 이루어졌으나,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려실록은 고려시대에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이다. 매년 각 관청에서 기록하던 일록(日錄)과 국왕의 언행과 신하들의 견문 기록인 사고(史藁), 문집 등을 자료로 편찬되었으며, 국왕의 사망 직후에 전문 편수관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다.
고려실록 (高麗實錄)
고려실록은 고려시대에 편년체로 서술된 역사서이다. 매년 각 관청에서 기록하던 일록(日錄)과 국왕의 언행과 신하들의 견문 기록인 사고(史藁), 문집 등을 자료로 편찬되었으며, 국왕의 사망 직후에 전문 편수관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