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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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위해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사회운동단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民主憲法爭取 國民運動本部)
1987년 5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조치 철회와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위해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사회운동단체.
1983년 9월 민족통일, 부정부패특권정치의 청산, 냉전체제 해소 등을 목표로 하여 19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중운동단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民主化運動靑年聯合)
1983년 9월 민족통일, 부정부패특권정치의 청산, 냉전체제 해소 등을 목표로 하여 19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중운동단체.
1971년에 결성된 최초의 재야 민주화운동 상설조직.
민주수호국민협의회 (民主守護國民協議會)
1971년에 결성된 최초의 재야 민주화운동 상설조직.
민주화 운동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설립된 공공법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민주화 운동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설립된 공공법인.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을 발행하는 기관.
민주조선사 (民主朝鮮社)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을 발행하는 기관.
1984년 조직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이 1985년 구속된 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民主化推進委員會 事件)
1984년 조직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이 1985년 구속된 사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95년 11월 조직된 전국 노동조합의 총연합단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
1995년 11월 조직된 전국 노동조합의 총연합단체.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3월 30일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되어 2006년 3월 10일까지 존속한 정당이다. 충청도에 지지 기반을 두었으며 의원내각제를 당론으로 삼았다. 국민의 정부 시기인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공동 여당이었다.
자유민주연합 (自由民主聯合)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3월 30일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되어 2006년 3월 10일까지 존속한 정당이다. 충청도에 지지 기반을 두었으며 의원내각제를 당론으로 삼았다. 국민의 정부 시기인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공동 여당이었다.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제5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1980년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에 대한 대응으로 1982년 민족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방법을 원칙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거부와 제5공화국 자체의 도덕적·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비판운동이 확산되면서 실효성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평화협정 없이 휴전협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적대관계 해소를 도모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민족자결 원칙을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유엔의 관여를 배제하고 대신 민족 내부적 성격을 강화했다는 의의도 있다.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民族和合民主統一方案)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제5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1980년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에 대한 대응으로 1982년 민족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방법을 원칙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거부와 제5공화국 자체의 도덕적·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비판운동이 확산되면서 실효성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평화협정 없이 휴전협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적대관계 해소를 도모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민족자결 원칙을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유엔의 관여를 배제하고 대신 민족 내부적 성격을 강화했다는 의의도 있다.
재미한인사회에서 모국인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전개한 사회운동.
재미한인 민주화운동 (在美韓人 民主化運動)
재미한인사회에서 모국인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전개한 사회운동.
1989년 1월 21일 창립된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전국적 통합조직.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
1989년 1월 21일 창립된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전국적 통합조직.
북한 법률가들의 단체.
조선민주법률가협회 (朝鮮民主法律家協會)
북한 법률가들의 단체.
제9대, 10대, 12대, 13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동영 (金東英)
제9대, 10대, 12대, 13대 국회의원, 정무제1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
유럽 동부 내륙에 있는 공화국.
몰도바 (Moldova)
유럽 동부 내륙에 있는 공화국.
박용만은 해방 이후 9, 10, 12, 13대 국회의원, 국회행정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24년에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학생동맹위원장을 지낸 이래 우익 청년운동, 반동·반탁 투쟁에 앞장섰다. 1950년에 정계에 투신하여 1973년 9대 선거에서야 당선되어 ‘칠전팔기’의 주인공으로 회자된 인물이다.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에 앞장섰으나 이기붕과 결별하면서 탈당했다. 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로 야당에게 국회직이 배정되자 국회행정위원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이승만의 건국 정통성 옹호운동을 벌였다.
박용만 (朴容萬)
박용만은 해방 이후 9, 10, 12, 13대 국회의원, 국회행정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24년에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학생동맹위원장을 지낸 이래 우익 청년운동, 반동·반탁 투쟁에 앞장섰다. 1950년에 정계에 투신하여 1973년 9대 선거에서야 당선되어 ‘칠전팔기’의 주인공으로 회자된 인물이다.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에 앞장섰으나 이기붕과 결별하면서 탈당했다. 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로 야당에게 국회직이 배정되자 국회행정위원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이승만의 건국 정통성 옹호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김정렬 (金貞烈)
해방 이후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청소년의 사상교양도서 및 중․고등학생용 교재를 출판하는 북한의 출판사.
금성청년출판사 (金星靑年出版社)
청소년의 사상교양도서 및 중․고등학생용 교재를 출판하는 북한의 출판사.
작자·연대 미상의 규방가사.
말세풍운가 (末世風雲歌)
작자·연대 미상의 규방가사.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