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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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대전제 아래 민족적·사회경제적 모순구조를 분석하고 그 모순을 해결해 가는 민중의 활동을 역사서술의 중심에 두는 역사학계의 학문사조이다. 1980년대 초반 정창렬, 이만열, 강만길 등이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는 시대적 경향을 수용하여 제시하였다. 역사문제연구소·망원한국사연구실·한국근대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민중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도식적 역사발전 단계론을 비판하며 민중의 자기 해방 과정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민중사학 (民衆史學)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대전제 아래 민족적·사회경제적 모순구조를 분석하고 그 모순을 해결해 가는 민중의 활동을 역사서술의 중심에 두는 역사학계의 학문사조이다. 1980년대 초반 정창렬, 이만열, 강만길 등이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는 시대적 경향을 수용하여 제시하였다. 역사문제연구소·망원한국사연구실·한국근대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민중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도식적 역사발전 단계론을 비판하며 민중의 자기 해방 과정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에서 민중의 기독교적 해석에 근거해 형성된 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서구 중심에서 탈피하여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신학과 교회 운동을 모색하려는 한국의 독창적 신학 사상이다. 1970년대 민중신학에 대해 논의했던 신학자들은 1980년대에 민중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전개했다. 또한 ‘밥상공동체’와 같은 민중교회를 설립해 민중신학의 실천성과 현장성을 추구했다. 1990년대 이후 민중신학은 시민의 사회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한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는 독창적 한국 신학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민중신학 (民衆神學)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에서 민중의 기독교적 해석에 근거해 형성된 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서구 중심에서 탈피하여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신학과 교회 운동을 모색하려는 한국의 독창적 신학 사상이다. 1970년대 민중신학에 대해 논의했던 신학자들은 1980년대에 민중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전개했다. 또한 ‘밥상공동체’와 같은 민중교회를 설립해 민중신학의 실천성과 현장성을 추구했다. 1990년대 이후 민중신학은 시민의 사회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한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는 독창적 한국 신학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진보적인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회변혁운동이다. 민중미술은 기존의 심미주의적 형식주의가 판치는 미술계에 대한 반성으로, 미술을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는 미술인들의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시민판화운동, 학생운동·노동운동의 걸개그림 등 민중과 함께 하는 미술로 발전해 나갔으며 사실적 묘사, 콜라주, 사진, 전통미술 도상 차용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주제를 표현했다. 1980년대에 한국미술의 새 흐름을 형성하여,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시대적이고 독창적인 미술로 인정받고 있다.
민중미술 (民衆美術)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진보적인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회변혁운동이다. 민중미술은 기존의 심미주의적 형식주의가 판치는 미술계에 대한 반성으로, 미술을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는 미술인들의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시민판화운동, 학생운동·노동운동의 걸개그림 등 민중과 함께 하는 미술로 발전해 나갔으며 사실적 묘사, 콜라주, 사진, 전통미술 도상 차용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주제를 표현했다. 1980년대에 한국미술의 새 흐름을 형성하여,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시대적이고 독창적인 미술로 인정받고 있다.
민중문화운동은 1970∼80년대 민중을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상정하고 진행된 문화운동이다. 1970년대에 민족적 전통을 표방한 다양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한 관제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지배 세력과 구분되는 민중을 강조하는 대학가의 대동놀이가 등장하였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아우르는 민중을 주도 세력으로 활성화되어 문학, 영화, 음악, 미술, 건축 등의 분야로 확산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중문화를 지향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결성되었다.
민중문화운동 (民衆文化運動)
민중문화운동은 1970∼80년대 민중을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상정하고 진행된 문화운동이다. 1970년대에 민족적 전통을 표방한 다양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한 관제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지배 세력과 구분되는 민중을 강조하는 대학가의 대동놀이가 등장하였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아우르는 민중을 주도 세력으로 활성화되어 문학, 영화, 음악, 미술, 건축 등의 분야로 확산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중문화를 지향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결성되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1985년 9월 결성된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이다. 1983년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강력한 재야통합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두 단체가 통합하여 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엽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 그리고 여러 개신교 운동단체 등이 추가로 가입하면서 폭넓은 운동 연합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야당, 종교계와 연대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약칭 고문공대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이 1961년 230,000여 어휘를 수록하여 편찬한 국어사전.
국어대사전 (國語大辭典)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이 1961년 230,000여 어휘를 수록하여 편찬한 국어사전.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입법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박건웅 (朴健雄)
일제강점기 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입법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국경의 밤」은 1925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한 김동환이 쓴 한국 최초 근대 서사시이다. 동명의 시집 『국경의 밤』에 실려 있다. 지식인 선비와 여진족 후예인 순이의 사랑을 현재와 과거 회상을 오가는 시제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일본 민중문학파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이며 대중적인 시를 추구한 시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국경의 밤 (國境의 밤)
「국경의 밤」은 1925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한 김동환이 쓴 한국 최초 근대 서사시이다. 동명의 시집 『국경의 밤』에 실려 있다. 지식인 선비와 여진족 후예인 순이의 사랑을 현재와 과거 회상을 오가는 시제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일본 민중문학파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이며 대중적인 시를 추구한 시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안병무는 1922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북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여성운동가 박영숙과 결혼했고, 박영숙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의 민중신학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도 한국신학연구소는 계간지 《신학사상》(神學思想)과 신학 서적들을 간행하고 있다. 1953년 5월 1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를 홍창의 등 12명의 형제들과 함께 설립하였다.
안병무 (安炳茂)
안병무는 1922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북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여성운동가 박영숙과 결혼했고, 박영숙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의 민중신학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도 한국신학연구소는 계간지 《신학사상》(神學思想)과 신학 서적들을 간행하고 있다. 1953년 5월 1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를 홍창의 등 12명의 형제들과 함께 설립하였다.
신학은 천주교에서 초인간적 존재의 계시를 신앙과 이성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국 천주교 신학은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 천주교 서적을 연구한 지성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서구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1960년대 후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신학자들이 토착화, 교회일치, 해방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남미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영향으로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신학적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천주교 사회교리’가 전파되며 ‘천주교 사회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신학 (神學)
신학은 천주교에서 초인간적 존재의 계시를 신앙과 이성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국 천주교 신학은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 천주교 서적을 연구한 지성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서구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1960년대 후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신학자들이 토착화, 교회일치, 해방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남미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영향으로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신학적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천주교 사회교리’가 전파되며 ‘천주교 사회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해방 이후 「동학」· 「농부와 아들」·「여공」·「지옥도」 등의 작품을 낸 조각가. 판화가.
오윤 (吳潤)
해방 이후 「동학」· 「농부와 아들」·「여공」·「지옥도」 등의 작품을 낸 조각가. 판화가.
해방 이후 한국신학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목사.
서남동 (徐南同)
해방 이후 한국신학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목사.
일제강점기 때, 대동청년당, 광복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총무,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서상일 (徐相日)
일제강점기 때, 대동청년당, 광복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총무,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희곡집『운명』을 저술한 작가. 극작가, 소설가, 영화감독.
윤백남 (尹白南)
일제강점기 희곡집『운명』을 저술한 작가. 극작가, 소설가, 영화감독.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윤보선 (尹潽善)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운명」은 1920년 12월 초연되고 1924년 희곡집 『운명(運命)』에 수록된 윤백남의 1막 2장의 희곡이다. 하와이 사진결혼의 폐해를 소재로 삼아 당대 소인극단 및 전문극단에서 활발히 공연되었던 사회극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희곡의 근대성과 직업 연극인들의 사회극 기획의 실제를 보여 준다.
운명 (運命)
「운명」은 1920년 12월 초연되고 1924년 희곡집 『운명(運命)』에 수록된 윤백남의 1막 2장의 희곡이다. 하와이 사진결혼의 폐해를 소재로 삼아 당대 소인극단 및 전문극단에서 활발히 공연되었던 사회극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희곡의 근대성과 직업 연극인들의 사회극 기획의 실제를 보여 준다.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원, 신흥청년사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임원근 (林元根)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원, 신흥청년사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유극장은 1966년 4월에 ‘참된 한국 현대극 창조’를 기치로 내걸고 창립된 극단이다. 디자이너 이병복, 연출가 김정옥이 주축이 되고 김혜자·최불암 등이 단원으로 가담해 창립되었다. 희극을 주로 공연하면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창립공연은 1966년 「따라지의 향연」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대머리 여가수」 외에 다수가 있다. 동아연극상·백상예술상에서 대상과 작품상, 예술상, 미술상 등을 다수 수상하였다. 2006년 극단의 이름을 ‘창작집단 자유’로 변경하였다. 감각적으로 앞서가면서 왕성한 공연 활동을 펼친 동인제 시스템의 극단이다.
자유극장 (自由劇場)
자유극장은 1966년 4월에 ‘참된 한국 현대극 창조’를 기치로 내걸고 창립된 극단이다. 디자이너 이병복, 연출가 김정옥이 주축이 되고 김혜자·최불암 등이 단원으로 가담해 창립되었다. 희극을 주로 공연하면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창립공연은 1966년 「따라지의 향연」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대머리 여가수」 외에 다수가 있다. 동아연극상·백상예술상에서 대상과 작품상, 예술상, 미술상 등을 다수 수상하였다. 2006년 극단의 이름을 ‘창작집단 자유’로 변경하였다. 감각적으로 앞서가면서 왕성한 공연 활동을 펼친 동인제 시스템의 극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