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방안"
검색결과 총 15건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정당.
민족혁명당 (民族革命黨)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정당.
조선후기 공인에게 부과한 과중한 부담을 바로잡기 위해 마련한 규정집.
비변사공폐이정계하절목 (備邊司貢弊釐正啓下節目)
조선후기 공인에게 부과한 과중한 부담을 바로잡기 위해 마련한 규정집.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농민군이 철수하자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내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이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교정청은 일본측에 군사 철수와 내정 개혁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입안한 12개 조항의 개혁내용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은 폐지되고 그 역할은 군국기무처로 넘어갔다.
교정청 (校正廳)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농민군이 철수하자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내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이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교정청은 일본측에 군사 철수와 내정 개혁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입안한 12개 조항의 개혁내용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은 폐지되고 그 역할은 군국기무처로 넘어갔다.
제네바회담은 1954년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 모색을 위해 개최했던 국제정치회담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이는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1954년 4월 26일 제네바회담이 개최되었다. 두 달 동안에 걸쳐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 범위, 국제감독, 외국군 철수, 유엔 권위 문제 등에 관한 토의를 벌였다. 그러나 회담의 결렬로 한반도는 휴전체제 아래 분단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제네바회담은 남북한이 최초로 통일방안을 공개적인 장에서 논의한 회의였다.
제네바회담 (Geneva會談)
제네바회담은 1954년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 모색을 위해 개최했던 국제정치회담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이는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1954년 4월 26일 제네바회담이 개최되었다. 두 달 동안에 걸쳐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 범위, 국제감독, 외국군 철수, 유엔 권위 문제 등에 관한 토의를 벌였다. 그러나 회담의 결렬로 한반도는 휴전체제 아래 분단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제네바회담은 남북한이 최초로 통일방안을 공개적인 장에서 논의한 회의였다.
『호남지도』는 1739년~1750년 사이 전라도의 군현 지도와 도별 지도를 수록하여 제작한 7첩 63장의 군현 지도집이다. 1첩부터 6첩까지는 제주도의 제주, 정의, 대정 등 3개 군현을 제외한 전라도의 53개 군현 지도를 수록하였으며, 7첩에는 호남 전도와 전라좌도 지도, 전라우도 지도를 수록하였다. 18세기 중앙정부가 각 군현을 파악하기 위해 전라도의 지도를 관리하고, 이를 비변사에서 활용하였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지도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 발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호남지도 (湖南地圖)
『호남지도』는 1739년~1750년 사이 전라도의 군현 지도와 도별 지도를 수록하여 제작한 7첩 63장의 군현 지도집이다. 1첩부터 6첩까지는 제주도의 제주, 정의, 대정 등 3개 군현을 제외한 전라도의 53개 군현 지도를 수록하였으며, 7첩에는 호남 전도와 전라좌도 지도, 전라우도 지도를 수록하였다. 18세기 중앙정부가 각 군현을 파악하기 위해 전라도의 지도를 관리하고, 이를 비변사에서 활용하였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지도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 발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호서지도』는 조선 후기 충청도 전도 2장과 대축척 군현 지도 68장을 6첩으로 나누어 수록한 지도집이다. 채색 필사본이며, 200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충청도 전도인 ‘충청도 도지도’는 10리 방안의 눈금 위에 그렸고, 각 군현 지도는 1리 방안을 기준으로 제작하였다. 4첩에 수록한 ‘도내 도지도’와 11장의 군현 지도, 6첩에 수록한 10장의 군현 지도는 방안 위에 그린 지도가 아닌 회화식 군현 지도이다. 비변사에서 보관하여 사용하던 지도였다는 점에서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호서지도 (湖西地圖)
『호서지도』는 조선 후기 충청도 전도 2장과 대축척 군현 지도 68장을 6첩으로 나누어 수록한 지도집이다. 채색 필사본이며, 200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충청도 전도인 ‘충청도 도지도’는 10리 방안의 눈금 위에 그렸고, 각 군현 지도는 1리 방안을 기준으로 제작하였다. 4첩에 수록한 ‘도내 도지도’와 11장의 군현 지도, 6첩에 수록한 10장의 군현 지도는 방안 위에 그린 지도가 아닌 회화식 군현 지도이다. 비변사에서 보관하여 사용하던 지도였다는 점에서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해동여지도』는 조선 후기 전국 336개의 군현지도를 수록한 지도집이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 곤, 보 3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34.1×21.2㎝, 지도의 광곽은 25㎝×17㎝이다. 건책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곤책에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보책은 군현별 통계가 정리되어 있다. 고을 지도는 방안 위에 그려져 있고, 방안에 경위선 수치가 기록되어 있어 전국의 좌표 체계를 바탕으로 각 고을의 위치를 그렸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군현지도가 대축척전도로 발달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해동여지도 (海東輿地圖)
『해동여지도』는 조선 후기 전국 336개의 군현지도를 수록한 지도집이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 곤, 보 3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34.1×21.2㎝, 지도의 광곽은 25㎝×17㎝이다. 건책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곤책에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보책은 군현별 통계가 정리되어 있다. 고을 지도는 방안 위에 그려져 있고, 방안에 경위선 수치가 기록되어 있어 전국의 좌표 체계를 바탕으로 각 고을의 위치를 그렸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군현지도가 대축척전도로 발달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함경도·경기도·강원도의 3개 지역만을 그린 지도. 도별도.
함경도·경기도·강원도지도 (咸鏡道·京畿道·江原道地圖)
조선후기 함경도·경기도·강원도의 3개 지역만을 그린 지도. 도별도.
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에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정권은 정변에 개입한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교섭으로 5개 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성조약 (漢城條約)
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에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정권은 정변에 개입한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교섭으로 5개 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낮은 단계 연방제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북한 측의 통일방안이다. 1991년 북한은 신년사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을 제안했다. 이 방식은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공동선언에서 북한의 통일방안이 ‘낮은 단계 연방제’로 공식 명명되었다.
낮은 단계 연방제 (낮은 段階 聯邦制)
낮은 단계 연방제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북한 측의 통일방안이다. 1991년 북한은 신년사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을 제안했다. 이 방식은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공동선언에서 북한의 통일방안이 ‘낮은 단계 연방제’로 공식 명명되었다.
민족통일협상회의는 1989년 9월 28일 북한이 남한의 정부·정당·사회단체 대표들에게 제안한 회의이다. 1973년 김일성의 ‘대민족회의’ 제안 이후 북한은 정치협상회의 형태의 대남 정치선전 공세를 계속 전개해 왔다. 민족통일협상회의는 1989년 북한의 외교부 부장 김영남이 제안한 것으로 남북 각각 60명이 조국통일 방도 등을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개최하되, 모든 대표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는 원탁회의 방식을 제안하였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 제안이 남한의 국론 분열을 목적으로 한 대남 선전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제안을 거절하였다.
민족통일협상회의 (民族統一協商會議)
민족통일협상회의는 1989년 9월 28일 북한이 남한의 정부·정당·사회단체 대표들에게 제안한 회의이다. 1973년 김일성의 ‘대민족회의’ 제안 이후 북한은 정치협상회의 형태의 대남 정치선전 공세를 계속 전개해 왔다. 민족통일협상회의는 1989년 북한의 외교부 부장 김영남이 제안한 것으로 남북 각각 60명이 조국통일 방도 등을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개최하되, 모든 대표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는 원탁회의 방식을 제안하였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 제안이 남한의 국론 분열을 목적으로 한 대남 선전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제안을 거절하였다.
통일로 가는 중간과정에서 설정한 과도적 형태의 통일체제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남북연합 (南北聯合)
통일로 가는 중간과정에서 설정한 과도적 형태의 통일체제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고려연방제는 북한이 1960년부터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남과 북에 현존하는 상이한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방통일정부 수립 후 남북 양 지역정부가 내정을 맡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가 맡는 1민족·1국가·2제도·2정부 형태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데 주한미군 철수 등 무리한 선결조건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서독 주도하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 후, 흡수통일 방지를 위해 ‘완성형 연방제’에서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를 시도해오고 있다.
고려연방제 (高麗聯邦制)
고려연방제는 북한이 1960년부터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남과 북에 현존하는 상이한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방통일정부 수립 후 남북 양 지역정부가 내정을 맡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가 맡는 1민족·1국가·2제도·2정부 형태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고 있는데 주한미군 철수 등 무리한 선결조건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서독 주도하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 후, 흡수통일 방지를 위해 ‘완성형 연방제’에서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화를 시도해오고 있다.
국토완정은 북한에서 사회주의체제로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통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북한용어이다. 북한정권 수립 다음 날인 19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에 처음 등장했다. 1948∼1950년 초 국토완정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적인 통일정책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 국토완정은 남조선혁명노선과 3대 혁명역량 강화론으로 전환된다. 국토완정의 목표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국토완정 (國土完整)
국토완정은 북한에서 사회주의체제로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통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북한용어이다. 북한정권 수립 다음 날인 19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에 처음 등장했다. 1948∼1950년 초 국토완정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적인 통일정책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 국토완정은 남조선혁명노선과 3대 혁명역량 강화론으로 전환된다. 국토완정의 목표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회사채는 회사가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하고 투자자인 일반 대중에게 판매하는 유가증권이다. 회사채에는 발행자, 만기, 이자율, 이자 지급 방식이 명시되어 있으며, 이자 지급 방식, 이익 참가 형태, 보증 및 담보 유무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부터 전환 사채 형태로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자본 시장 육성법, 특히 채권 시장 육성 방안 이후에 발행이 촉진되었다. 회사채는 주식 시장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기업의 자금 조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회사채 (會社債)
회사채는 회사가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하고 투자자인 일반 대중에게 판매하는 유가증권이다. 회사채에는 발행자, 만기, 이자율, 이자 지급 방식이 명시되어 있으며, 이자 지급 방식, 이익 참가 형태, 보증 및 담보 유무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부터 전환 사채 형태로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자본 시장 육성법, 특히 채권 시장 육성 방안 이후에 발행이 촉진되었다. 회사채는 주식 시장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기업의 자금 조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