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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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사병 (私兵)
사병은 국가의 공적(公的)인 군제(軍制)에 포함되지 않고,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에 사적(私的)으로 예속되어 있는 무력집단이다. 족병(族兵)·가병(家兵)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가노(家奴)나 유민(流民)로 구성되었다. 9세기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유민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여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였는데,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다시 사병을 양성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사병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에 의해 혁파되었다.
고려시대 권세있는 대가(大家)에 사적으로 예속되어 있던 집단.
문객 (門客)
고려시대 권세있는 대가(大家)에 사적으로 예속되어 있던 집단.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금입택 (金入宅)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도방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宿衛機關)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이 처음 설치하였다. 경대승의 신변을 보호하는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숙위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경대승이 사망하고 해체되었다가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교대로 숙위하는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업무도 수행하였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 도방은 숙위만을 맡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정치적, 군사적 무력수단으로 활용되다가 무신정권이 몰락하며 폐지되었다.
도방 (都房)
도방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宿衛機關)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이 처음 설치하였다. 경대승의 신변을 보호하는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숙위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경대승이 사망하고 해체되었다가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교대로 숙위하는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업무도 수행하였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 도방은 숙위만을 맡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정치적, 군사적 무력수단으로 활용되다가 무신정권이 몰락하며 폐지되었다.
야별초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집권 무신 세력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무력적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은 야별초가 관군(官軍)이면서도 사병(私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확대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재편되었다가,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대몽 전쟁의 핵심 부대였고, 권력 변동에 중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야별초 (夜別抄)
야별초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이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집권 무신 세력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무력적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은 야별초가 관군(官軍)이면서도 사병(私兵)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확대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재편되었다가, 신의군(神義軍)이 조직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대몽 전쟁의 핵심 부대였고, 권력 변동에 중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우별초 (右別抄)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 중국군 헌병사령부 소교영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장흥 (張興)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 중국군 헌병사령부 소교영장 등을 역임한 군인·독립운동가.
조선 초기 중앙으로 번상(番上)하는 시위군(侍衛軍)을 파악, 지휘하던 장수의 직책.
절제사 (節制使)
조선 초기 중앙으로 번상(番上)하는 시위군(侍衛軍)을 파악, 지휘하던 장수의 직책.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정헌대부, 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한계순 (韓繼純)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정헌대부, 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