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사회주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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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민우회는 1936년 9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참가자들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전향자 친일 단체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고, 1941년 12월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영배격혈전대동맹을 조직하였다.
대동민우회 (大東民友會)
대동민우회는 1936년 9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참가자들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전향자 친일 단체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고, 1941년 12월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영배격혈전대동맹을 조직하였다.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무산자동맹회 (無産者同盟會)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무산자동지회 (無産者同志會)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강순 (姜舜)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한 (金翰)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호반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말경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경남도책을 맡았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을 맡았다. 1931년 2월 함흥질소비료회사의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호반 (金鎬盤)
김호반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말경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경남도책을 맡았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을 맡았다. 1931년 2월 함흥질소비료회사의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신인동맹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사회혁명당[서울파]’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조직되었다. 심상완(沈相完), 신일용(辛日鎔), 이영(李英), 장병천(張炳天)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인류 생활의 공존공영적(共存共榮的) 진리를 파악하여 민중문화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22년 3월 31일에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신인동맹회 (新人同盟會)
신인동맹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사회혁명당[서울파]’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조직되었다. 심상완(沈相完), 신일용(辛日鎔), 이영(李英), 장병천(張炳天)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인류 생활의 공존공영적(共存共榮的) 진리를 파악하여 민중문화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22년 3월 31일에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이인섭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 등과 교섭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 등을 역임하였다. 국내에서는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인섭 (李仁燮)
이인섭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 등과 교섭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 등을 역임하였다. 국내에서는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