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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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의 토축 성곽. 토성.
만월성 (滿月城)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의 토축 성곽. 토성.
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월성 (慶州 月城)
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금입택 (金入宅)
금입택은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귀족들의 대주택이다. 쇠드리댁·금드리댁으로 불리며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금입택의 집 이름으로는 재매정택, 지상택 등이 있으며 『삼국유사』에 39채가 기록되어 있다. 금입택은 삼국통일 전쟁의 포상으로 받은 지방의 토지와 관직 독점으로 이룩한 진골귀족들의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가진 금입택의 주인은 불교 사원 건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금입택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사치 생활은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국가 권력의 약화를 보여준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경주 황남리 고분군 (慶州 皇南里 古墳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비담의 난은 신라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년 가량 뒤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선덕여왕을 옹위하던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와 대치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 등 율령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비담의 난 (毗曇의 亂)
비담의 난은 신라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년 가량 뒤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선덕여왕을 옹위하던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와 대치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 등 율령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의 나아천 하구로 추정되는 지명.
아진포구 (阿珍浦口)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의 나아천 하구로 추정되는 지명.
이천은 고려 후기 우사보(右思補), 첨의평리상의(僉議平理商議), 정당문학 등을 지낸 문신이다. 그는 우사보로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하여 충숙왕의 총애를 받는 이인길의 첩장인 최득화의 지방관 임명을 저지하였다. 재상으로서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서연(書筵) 시강과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지냈다.
이천 (李蒨)
이천은 고려 후기 우사보(右思補), 첨의평리상의(僉議平理商議), 정당문학 등을 지낸 문신이다. 그는 우사보로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하여 충숙왕의 총애를 받는 이인길의 첩장인 최득화의 지방관 임명을 저지하였다. 재상으로서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서연(書筵) 시강과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지냈다.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세거한 경주 강동면의 씨족 마을이다. 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혼인을 계기로 처가 쪽으로 이주하면서 차례로 입향했고 이곳에서 초기부터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면서 번창하여 마을 내에 우수한 건축물을 다수 조성하였다. 마을은 물(勿)자형의 형국으로 네 갈래의 능선과 안산인 성주봉 기슭, 이들 사이의 골짜기에 형성된 작은 동네들로 공간이 나뉘며 능선에는 대종가, 파종가 등의 주요 건물들, 그 아래의 골짜기와 주변 지역에 그 밖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경주 양동마을 (慶州 良洞마을)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세거한 경주 강동면의 씨족 마을이다. 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혼인을 계기로 처가 쪽으로 이주하면서 차례로 입향했고 이곳에서 초기부터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면서 번창하여 마을 내에 우수한 건축물을 다수 조성하였다. 마을은 물(勿)자형의 형국으로 네 갈래의 능선과 안산인 성주봉 기슭, 이들 사이의 골짜기에 형성된 작은 동네들로 공간이 나뉘며 능선에는 대종가, 파종가 등의 주요 건물들, 그 아래의 골짜기와 주변 지역에 그 밖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
한산초등학교 (韓山初等學校)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전기 경주손씨 양민공 손소 관련 주택.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慶州 良洞마을 松簷宗宅)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전기 경주손씨 양민공 손소 관련 주택.
수력지명각석편(首力知銘刻石片)은 삼국시대 신라 인명과 관등을 새긴 각석 조각이다. 발견한 수로 주변에 월성해자 시설이 있기에, ‘월성해자비(月城垓字碑)’라고도 부른다.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차3인야(作人 居丁次 及伐車 徒人 首力知奈末 此三人也)"로 석독할 수 있으며,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이들 3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에 축조된 월성이나 월성해자 등 토목공사를 완료한 뒤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인다.
수력지명 각석편 (首力知銘 刻石片)
수력지명각석편(首力知銘刻石片)은 삼국시대 신라 인명과 관등을 새긴 각석 조각이다. 발견한 수로 주변에 월성해자 시설이 있기에, ‘월성해자비(月城垓字碑)’라고도 부른다.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차3인야(作人 居丁次 及伐車 徒人 首力知奈末 此三人也)"로 석독할 수 있으며,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이들 3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에 축조된 월성이나 월성해자 등 토목공사를 완료한 뒤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인다.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있는 용암정과 그 주변 지역.
거창 용암정 일원 (居昌 龍巖亭 一圓)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있는 용암정과 그 주변 지역.
해자는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이다.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에서 유래하였는데, 주로 성곽이나 고분에 조성되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거나 식수를 확보하거나,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대형 고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을 축조하거나 고분을 조성할 때 주변에서 흙을 채취하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해자 (垓子)
해자는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이다.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에서 유래하였는데, 주로 성곽이나 고분에 조성되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거나 식수를 확보하거나,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대형 고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을 축조하거나 고분을 조성할 때 주변에서 흙을 채취하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