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광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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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1922년 11월 도쿄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노동운동 단체이다. 재일 조선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촉진하고 직업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전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한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계기로 손영극, 이헌 등이 설립에 주축이 되었다. 창립 이후 조선과 일본의 노동운동 연대를 추구하는 한편 재일 한인 노동자의 생존권 옹호, 민족의식 고양 등을 위해 앞장섰다. 1925년에는 일본 전체의 한인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창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재일 한인의 노동운동을 한 차원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동경조선노동동맹회 (東京朝鮮勞動同盟會)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1922년 11월 도쿄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노동운동 단체이다. 재일 조선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촉진하고 직업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전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한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계기로 손영극, 이헌 등이 설립에 주축이 되었다. 창립 이후 조선과 일본의 노동운동 연대를 추구하는 한편 재일 한인 노동자의 생존권 옹호, 민족의식 고양 등을 위해 앞장섰다. 1925년에는 일본 전체의 한인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창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재일 한인의 노동운동을 한 차원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1932년 일본 도쿄에서 민족 해방을 위해 한인 공산주의자 조직을 재건하고자 결성된 비밀 조직.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일본출판부 (朝鮮共産黨再建協議會 日本出版部)
1932년 일본 도쿄에서 민족 해방을 위해 한인 공산주의자 조직을 재건하고자 결성된 비밀 조직.
재일 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풍의 성명. 통명·통칭이름.
통칭명 (通稱名)
재일 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풍의 성명. 통명·통칭이름.
재일 한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한국풍의 성명. 본명.
민족명 (民族名)
재일 한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한국풍의 성명. 본명.
식민지 시기에 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강제동원되어 도일한 한인들이 일본 패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이후부터 1950년에 걸쳐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한 사회현상.
재일조선인 귀환 (在日朝鮮人 歸還)
식민지 시기에 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강제동원되어 도일한 한인들이 일본 패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이후부터 1950년에 걸쳐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한 사회현상.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은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의 고반초, 로쿠반초를 중심으로 한국식 음식점과 식자재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1920~1930년대 7천7백여 명의 한인들이 나카타구의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 귀환하지 않고 잔류한 한인들은 고베의 합성피혁 신발 산업에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했다. 나가타구의 합성피혁 산업은 1970년대에는 번성했으나, 1980년대 후반 엔고와 1990년대 중국산 저가 제품의 수입으로 쇠퇴했다. 2010년 기준 나가타구 거주자 중 약 4.6%가 한국·조선인이며, 이는 효고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 (Kôbe[神戶] Nagata[長田]區 韓人村)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은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의 고반초, 로쿠반초를 중심으로 한국식 음식점과 식자재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1920~1930년대 7천7백여 명의 한인들이 나카타구의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 귀환하지 않고 잔류한 한인들은 고베의 합성피혁 신발 산업에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했다. 나가타구의 합성피혁 산업은 1970년대에는 번성했으나, 1980년대 후반 엔고와 1990년대 중국산 저가 제품의 수입으로 쇠퇴했다. 2010년 기준 나가타구 거주자 중 약 4.6%가 한국·조선인이며, 이는 효고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교토 히가시쿠조 한인촌은 JR 교토역의 남쪽과 가모강의 서쪽 사이에 위치하는 교토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피차별 부락민이 밀집해 거주하였던 지역으로 1920년대에 대규모 토목공사에 고용된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패전 직후 암시장이 형성되면서 한인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나 행적 당국의 방치로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197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행정 지번이 부여되고, 전기와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1992년부터 매년 11월에 ‘히가시구조 마당’이라는 한인들에 의한 문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교토 히가시쿠조 한인촌 (Kyôto[京都] Higashi[東九條] 韓人村)
교토 히가시쿠조 한인촌은 JR 교토역의 남쪽과 가모강의 서쪽 사이에 위치하는 교토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피차별 부락민이 밀집해 거주하였던 지역으로 1920년대에 대규모 토목공사에 고용된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패전 직후 암시장이 형성되면서 한인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나 행적 당국의 방치로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197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행정 지번이 부여되고, 전기와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1992년부터 매년 11월에 ‘히가시구조 마당’이라는 한인들에 의한 문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은 도쿄도 신주쿠구에 위치한 한국식의 음식점, 주점, 패션 가게, 잡화점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인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서 신주쿠의 오쿠보역과 신오쿠보역의 철교 아래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1950년 롯데제과 공장이 설립되면서 일본 각지에서 한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전철역이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비가 저렴하여 한국인 여행자를 대상의 업소가 증가하였고, 한류 붐으로 일본인 방문자도 급증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오쿠보·햐쿠닌초 일대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른다.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 (Tôkyô[東京] Shinokubo[新大久保] 韓人村)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은 도쿄도 신주쿠구에 위치한 한국식의 음식점, 주점, 패션 가게, 잡화점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인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서 신주쿠의 오쿠보역과 신오쿠보역의 철교 아래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1950년 롯데제과 공장이 설립되면서 일본 각지에서 한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전철역이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비가 저렴하여 한국인 여행자를 대상의 업소가 증가하였고, 한류 붐으로 일본인 방문자도 급증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오쿠보·햐쿠닌초 일대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른다.
오사카 이쿠노구 한인촌은 츠루하시와 모모타니역 사이에 위치한 한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 출신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며, 고무 공업과 토목업, 노점상 등에 종사했다. 1930년대에 한반도 식자재와 생활 잡화를 파는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인 2세, 3세들이 중심이 되어 시장을 활성화하며 ‘코리아타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0년대 한류 붐으로 관광객이 늘면서 더욱 발전했다. 2010년 기준 약 2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오사카 이쿠노구 한인촌 (Oosaka[大阪] Ikuno[生野]區 韓人村)
오사카 이쿠노구 한인촌은 츠루하시와 모모타니역 사이에 위치한 한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 출신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며, 고무 공업과 토목업, 노점상 등에 종사했다. 1930년대에 한반도 식자재와 생활 잡화를 파는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인 2세, 3세들이 중심이 되어 시장을 활성화하며 ‘코리아타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0년대 한류 붐으로 관광객이 늘면서 더욱 발전했다. 2010년 기준 약 2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