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배창현"
검색결과 총 11건
봉화 계서당 종택(奉化 溪西堂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경영하던 초당을 후손들이 중건한 종택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성이성이 지은 방 1칸 규모의 계서초당(溪西草堂)을 후손들이 증축하여 기와집으로 바꾸었고, 이후 건물을 하나씩 지어 종택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ㅁ자형의 주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 등 주요 건물들의 건립 연대가 다르고 증축 · 개축의 흔적이 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ㅁ자형 뜰집의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봉화 계서당 종택 (奉化 溪西堂 宗宅)
봉화 계서당 종택(奉化 溪西堂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이성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경영하던 초당을 후손들이 중건한 종택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성이성이 지은 방 1칸 규모의 계서초당(溪西草堂)을 후손들이 증축하여 기와집으로 바꾸었고, 이후 건물을 하나씩 지어 종택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ㅁ자형의 주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 등 주요 건물들의 건립 연대가 다르고 증축 · 개축의 흔적이 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ㅁ자형 뜰집의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光山金氏 齋舍 및 祠堂)은 조선 중기에 경상북도 안동시 오천면 외내마을에 지어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인근의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진 광산김씨의 재사 및 사당이다. 이 사당은 입향조로 알려진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536년(중종 31)에 지어진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를 합향한 것이다. 재사는 2동의 ㅡ자형 건물과 1동의 고사(庫舍)로 구성된다. 이 건물들은 함께 옮겨진 후조당(後彫堂)의 부속 건물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하기 전의 배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光山金氏 齋舍 및 祠堂)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光山金氏 齋舍 및 祠堂)은 조선 중기에 경상북도 안동시 오천면 외내마을에 지어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인근의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진 광산김씨의 재사 및 사당이다. 이 사당은 입향조로 알려진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536년(중종 31)에 지어진 이후 김효로의 증손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를 합향한 것이다. 재사는 2동의 ㅡ자형 건물과 1동의 고사(庫舍)로 구성된다. 이 건물들은 함께 옮겨진 후조당(後彫堂)의 부속 건물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하기 전의 배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盈德 務安朴氏 武毅公派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17세기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건립한 주택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박의장의 넷째아들 도와(陶窩) 박선(朴璿)이 큰형 박유(朴瑜)를 위해 1644년(인조 22)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덕 지역에서 뜰집 유형의 확산이 가장 활발했던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ㅁ자형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도곡 충효당이 있다.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 (盈德 務安朴氏 武毅公派 宗宅)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盈德 務安朴氏 武毅公派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17세기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하며 건립한 주택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박의장의 넷째아들 도와(陶窩) 박선(朴璿)이 큰형 박유(朴瑜)를 위해 1644년(인조 22)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덕 지역에서 뜰집 유형의 확산이 가장 활발했던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ㅁ자형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도곡 충효당이 있다.
분천리 까치구멍집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있는 까치구멍집 주택이다.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산간 지역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는 겹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성에 부엌 앞쪽으로 1칸의 외양간이 돌출된 평면을 가지고 있다. 전면의 가운데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는 봉당이고, 봉당과 부엌 뒤편으로 각각 마루와 안방을 배치하였다.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의 건너편에는 사랑방 2칸이 있다. 마당 우측에는 돌담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 있다. 같은 마을에 겹집 유형인 도토마리집 한 채가 남아 있다.
분천리 까치구멍집 (汾川里 까치구멍집)
분천리 까치구멍집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있는 까치구멍집 주택이다.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산간 지역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는 겹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성에 부엌 앞쪽으로 1칸의 외양간이 돌출된 평면을 가지고 있다. 전면의 가운데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는 봉당이고, 봉당과 부엌 뒤편으로 각각 마루와 안방을 배치하였다.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의 건너편에는 사랑방 2칸이 있다. 마당 우측에는 돌담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 있다. 같은 마을에 겹집 유형인 도토마리집 한 채가 남아 있다.
빈동재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담(金淡)의 묘역 인근에 건립된 재사이다. 초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당의 8세손인 김이만(金履萬)의 문집에 수록된 「중건빈동재사기(重建賓洞齋舍記)」를 통해 1753년(영조 29)에 중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재사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5칸인 ㅁ자형 건물 1동인데, 지붕 가구는 모두 3량이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대지에 자리잡았는데, 이러한 입지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2층 공간을 두었다.
빈동재사 (賓洞齋舍)
빈동재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담(金淡)의 묘역 인근에 건립된 재사이다. 초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당의 8세손인 김이만(金履萬)의 문집에 수록된 「중건빈동재사기(重建賓洞齋舍記)」를 통해 1753년(영조 29)에 중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재사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5칸인 ㅁ자형 건물 1동인데, 지붕 가구는 모두 3량이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대지에 자리잡았는데, 이러한 입지를 활용해 부분적으로 2층 공간을 두었다.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은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까치구멍집 주택이다. 약 18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산간 지역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는 겹집인데, 그 중에서도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 부엌, 외양간 등을 3겹으로 둔 점이 특징적이다. 지붕틀은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작 지붕 양 측면 합각 부분을 비워 채광과 환기 구멍으로 사용한다. 이 외에도 벽면을 뚫은 환기구가 곳곳에 있다. 조선시대 산간 지역 주택의 폐쇄적 평면 구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 (奉化 雪梅里 三겹 까치구멍집)
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은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까치구멍집 주택이다. 약 18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산간 지역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는 겹집인데, 그 중에서도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 부엌, 외양간 등을 3겹으로 둔 점이 특징적이다. 지붕틀은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작 지붕 양 측면 합각 부분을 비워 채광과 환기 구멍으로 사용한다. 이 외에도 벽면을 뚫은 환기구가 곳곳에 있다. 조선시대 산간 지역 주택의 폐쇄적 평면 구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은 기묘사화 때 안동 풍산현으로 낙향한 예안이씨 7세손 이영이 1525년(중종 20)경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주택이다. 이영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필간(李弼幹)의 첫째 아들로, 1507년(중종 2)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좌우 익사로 연결되어 완전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정면에서 볼 때, 우측으로 1.5칸 정도가 돌출되어 있다. 가운데 설주가 있는 영쌍창과 같이 건립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집은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 (禮安李氏 司直公派 舊宅)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은 기묘사화 때 안동 풍산현으로 낙향한 예안이씨 7세손 이영이 1525년(중종 20)경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주택이다. 이영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필간(李弼幹)의 첫째 아들로, 1507년(중종 2)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좌우 익사로 연결되어 완전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정면에서 볼 때, 우측으로 1.5칸 정도가 돌출되어 있다. 가운데 설주가 있는 영쌍창과 같이 건립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집은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은 조선 전기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위치한 애은당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된 주택이다. ㅡ자형의 사랑채를 전면에 두고 조금 떨어져 남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안채를 뒤쪽에 놓아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의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 복원하였다.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 (浦項 吾德里 四友亭古宅)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은 조선 전기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위치한 애은당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된 주택이다. ㅡ자형의 사랑채를 전면에 두고 조금 떨어져 남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안채를 뒤쪽에 놓아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의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 복원하였다.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이 이강을 입향조로 하여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고방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나 후대에 중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 (浦項 吾德里 愛隱堂 故宅)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이 이강을 입향조로 하여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고방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나 후대에 중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금촌 두암고택은 조선시대의 문신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이 건립한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에 있는 주택이다. 분가 당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ㅁ자형의 몸채와, 후손들이 지은 함집당(咸集堂)이라는 이름의 별채, 김우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구성된다. 봉화읍에서 예천군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성천 변에 위치한 우금 마을 중심부의 낮은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전면에서 볼 때, 양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어 凸자형의 배치가 되었다. 폐쇄적인 안마당을 둔 경상북도 지역 뜰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우금촌 두암고택 (友琴村 斗巖古宅)
우금촌 두암고택은 조선시대의 문신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이 건립한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에 있는 주택이다. 분가 당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ㅁ자형의 몸채와, 후손들이 지은 함집당(咸集堂)이라는 이름의 별채, 김우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구성된다. 봉화읍에서 예천군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성천 변에 위치한 우금 마을 중심부의 낮은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전면에서 볼 때, 양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어 凸자형의 배치가 되었다. 폐쇄적인 안마당을 둔 경상북도 지역 뜰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상주 우복종택(尙州 愚伏宗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복(禹伏) 정경세(鄭經世)의 5세손인 정주원(鄭冑源)이 지은 주택이다. 정경세가 상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낙향하여 지은 건물은 초당과 계정인데, 이 중 초당은 종택 건립 이후에 대산루로 개축되었다. 종택은 대산루에서 남쪽으로 약 100미터 가량 떨어져 남북으로 흐르는 이안천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와 사당을 비롯해 사랑채, 안채, 아래채로 구성된 일곽과 남쪽에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묘로 구성된다.
상주 우복종택 (尙州 愚伏宗宅)
상주 우복종택(尙州 愚伏宗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복(禹伏) 정경세(鄭經世)의 5세손인 정주원(鄭冑源)이 지은 주택이다. 정경세가 상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낙향하여 지은 건물은 초당과 계정인데, 이 중 초당은 종택 건립 이후에 대산루로 개축되었다. 종택은 대산루에서 남쪽으로 약 100미터 가량 떨어져 남북으로 흐르는 이안천을 바라보며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와 사당을 비롯해 사랑채, 안채, 아래채로 구성된 일곽과 남쪽에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묘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