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동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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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형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군중 5,000여 명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원장리 시위군중들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고지형은 1921년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7년 순국하였다.
고지형 (高志亨)
고지형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군중 5,000여 명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원장리 시위군중들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고지형은 1921년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7년 순국하였다.
윤상열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일본 헌병 상등병 등을 살해하는 데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윤상열 (尹相悅)
윤상열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일본 헌병 상등병 등을 살해하는 데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홍씨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앞서 있었던 3월 1일의 안주읍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홍씨 (洪氏)
홍씨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앞서 있었던 3월 1일의 안주읍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고덕린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시장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강서군 반석면 사천장 시위에 합류하여 일본 헌병을 처단하는 데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0년 3월 6일 가출옥하였다.
고덕린 (高德麟)
고덕린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시장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강서군 반석면 사천장 시위에 합류하여 일본 헌병을 처단하는 데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0년 3월 6일 가출옥하였다.
김명하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8일 강계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수백 명이 전개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계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수천명의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태형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장독으로 1919년 5년 25일 순국하였다.
김명하 (金明河)
김명하는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8일 강계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수백 명이 전개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계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수천명의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태형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장독으로 1919년 5년 25일 순국하였다.
김병찬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8일 강계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수백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강계면 장날 만세시위에 2,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병찬 (金秉贊)
김병찬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8일 강계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수백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강계면 장날 만세시위에 2,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사걸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정주우체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행진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사걸 (金士杰)
김사걸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정주우체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선두에서 시위 군중을 주도하며 행진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석운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3,000~4,0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중들은 맞서 싸워 헌병주재소 건물과 헌병 숙소 등을 파괴하였다. 일본 헌병의 사격으로 김석운은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석운 (金碩運)
김석운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3,000~4,0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중들은 맞서 싸워 헌병주재소 건물과 헌병 숙소 등을 파괴하였다. 일본 헌병의 사격으로 김석운은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점현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사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 장날에 반석면 상사리 사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며 군중들과 대립하였고,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살해되었다. 김점현은 이 일로 붙잡힌 후, 가혹한 고문을 받던 중 강서경찰서에서 순국하였다.
김점현 (金漸鉉)
김점현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사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 장날에 반석면 상사리 사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며 군중들과 대립하였고,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살해되었다. 김점현은 이 일로 붙잡힌 후, 가혹한 고문을 받던 중 강서경찰서에서 순국하였다.
김제민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장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이어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며 군중들과 대립하였고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살해되었다. 평양헌병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김제민 (金濟民)
김제민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장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이어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며 군중들과 대립하였고 군중들에게 일본 헌병이 살해되었다. 평양헌병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1919년 11월 부산에서 안희제 등 백산상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한 부산·경남 지역 유지 40여명이 조직한 장학재단.
기미육영회 (己未育英會)
1919년 11월 부산에서 안희제 등 백산상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한 부산·경남 지역 유지 40여명이 조직한 장학재단.
1919년 10월 부산 지역 유지들이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교육 개선 등 문화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부산에서 결성한 사회단체.
부산예월회 (釜山例月會)
1919년 10월 부산 지역 유지들이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교육 개선 등 문화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부산에서 결성한 사회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