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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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한은 일제강점기 적색조선인혁명군 장교단장, 간도협조회 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2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1910년대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4년 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된 후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간도협조회 성립을 주도한 후 회장으로서 항일세력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상하는 데 앞장섰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일제는 그를 기려 동상을 건립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김동한 (金東漢)
김동한은 일제강점기 적색조선인혁명군 장교단장, 간도협조회 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2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1910년대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4년 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된 후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 간도협조회 성립을 주도한 후 회장으로서 항일세력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상하는 데 앞장섰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일제는 그를 기려 동상을 건립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민종묵은 일제강점기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근대적 조약과 통상에 대한 조사를 전담하였다. 이를 토대로 통상정책 수립을 위한 참고서인 『일본각국조약』을 편찬하고 외교 통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885년 3월 진주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내무당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이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사망할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1912년 종4위에 서위되었다.
민종묵 (閔種默)
민종묵은 일제강점기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근대적 조약과 통상에 대한 조사를 전담하였다. 이를 토대로 통상정책 수립을 위한 참고서인 『일본각국조약』을 편찬하고 외교 통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885년 3월 진주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내무당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이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사망할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1912년 종4위에 서위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지돈녕원사, 내장사장, 홍문관 부학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민형식 (閔炯植)
일제강점기 동지돈녕원사, 내장사장, 홍문관 부학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희경은 일제강점기 때 주차영국공사관, 이왕직사무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로 전문 외교직에서 활동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있을 때 조선 왕실과 통감 사이를 중개하였으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후 예식원 부경, 이왕직 사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6년 부친 고영희가 사망함에 따라 작위를 계승하고 백작으로 승작하였다.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귀족 사회의 친일 경향을 이끌어 낸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고희경 (高羲敬)
고희경은 일제강점기 때 주차영국공사관, 이왕직사무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주로 전문 외교직에서 활동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있을 때 조선 왕실과 통감 사이를 중개하였으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후 예식원 부경, 이왕직 사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6년 부친 고영희가 사망함에 따라 작위를 계승하고 백작으로 승작하였다.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귀족 사회의 친일 경향을 이끌어 낸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남궁영 (南宮營)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참여관,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성근은 일제강점기 의정부 참정,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서예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35년 한성 출생으로 1861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후 전라도관찰사 및 여러 판서직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8년 재등용되었다. 1900년 의정부 참정, 1902년에는 탁지부 대신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났는데, 유작 사공도의 「시품」 이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0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성근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김성근 (金聲根)
김성근은 일제강점기 의정부 참정,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서예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35년 한성 출생으로 1861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후 전라도관찰사 및 여러 판서직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8년 재등용되었다. 1900년 의정부 참정, 1902년에는 탁지부 대신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났는데, 유작 사공도의 「시품」 이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0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성근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박상준은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황해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0년 한성전보학당 시험에 우등으로 합격 후 6월에 금성전보사 주사로 임명되었다. 평남 강동군수, 순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926년 강원도지사로 승진하였다. 고위 관료를 지내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1929년 귀족의 예우에 해당하는 정4위에 서훈되었다. 1929년~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1943년 비행기, 현금, 제기 등을 일본군에 헌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조선 청소년의 입대를 선동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박상준 (朴相駿)
박상준은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황해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0년 한성전보학당 시험에 우등으로 합격 후 6월에 금성전보사 주사로 임명되었다. 평남 강동군수, 순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926년 강원도지사로 승진하였다. 고위 관료를 지내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1929년 귀족의 예우에 해당하는 정4위에 서훈되었다. 1929년~1945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1943년 비행기, 현금, 제기 등을 일본군에 헌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조선 청소년의 입대를 선동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관료.
김시권 (金時權)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관료.
일제강점기 산업부 상공과 과장, 충북지사, 충남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재홍 (朴在弘)
일제강점기 산업부 상공과 과장, 충북지사, 충남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빈은 일제강점기 승정원 동부승지, 사직서 제조, 승녕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8년 서울 출생으로 18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정원 가주서, 홍문관 교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이후 일제에 협력하였다. 1907년 승녕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1년 사망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특별상여금 500원을 받았다. 2009년 그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박제빈 (朴濟斌)
박제빈은 일제강점기 승정원 동부승지, 사직서 제조, 승녕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8년 서울 출생으로 18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정원 가주서, 홍문관 교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조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이후 일제에 협력하였다. 1907년 승녕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1년 사망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특별상여금 500원을 받았다. 2009년 그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김원근은 일제강점기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육영사업가이자 실업가이다. 호는 청암이다. 1886년(고종 23)에 출생하여 1965년에 사망했다. 청주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한 육영사업은 청주대학교와 산하 6개 초·중등학교로 확대되었다. 공직에 진출하여 1935년, 1941년~1945년 도회의원을 지냈다. 재력을 바탕으로 비행기 ‘충북호’ 헌납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매일신보』에 전쟁 승리 축전과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광고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
김원근 (金元根)
김원근은 일제강점기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육영사업가이자 실업가이다. 호는 청암이다. 1886년(고종 23)에 출생하여 1965년에 사망했다. 청주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한 육영사업은 청주대학교와 산하 6개 초·중등학교로 확대되었다. 공직에 진출하여 1935년, 1941년~1945년 도회의원을 지냈다. 재력을 바탕으로 비행기 ‘충북호’ 헌납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매일신보』에 전쟁 승리 축전과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광고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
박희도는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고종 26)에 출생하여 1952년 사망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혁명 기념으로 발간한 『신생활』11호가 빌미가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시중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1939년 1월 ‘내선일체’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박희도 (朴熙道)
박희도는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고종 26)에 출생하여 1952년 사망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혁명 기념으로 발간한 『신생활』11호가 빌미가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시중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1939년 1월 ‘내선일체’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일제강점기 개성전기주식회사 대표이사, 개성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정호 (金正浩)
일제강점기 개성전기주식회사 대표이사, 개성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이조 참판, 도승지,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춘희 (金春熙)
일제강점기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이조 참판, 도승지,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상호는 일제강점기 한성판윤, 외부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870년 한성 출생으로 본관은 여흥, 아버지는 민치억이며 민치덕에게 입양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외무참의, 외부 교섭국장, 학부 협판과 농상공부 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을 성사시킨 뒤 정동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데 기여하고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중추원 참의로 지내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적극 협력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민상호 (閔商鎬)
민상호는 일제강점기 한성판윤, 외부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1870년 한성 출생으로 본관은 여흥, 아버지는 민치억이며 민치덕에게 입양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외무참의, 외부 교섭국장, 학부 협판과 농상공부 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을 성사시킨 뒤 정동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데 기여하고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중추원 참의로 지내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적극 협력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일제강점기 홍문관 학사, 궁내부 특진관, 시종원경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학진 (金鶴鎭)
일제강점기 홍문관 학사, 궁내부 특진관, 시종원경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김경재는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기자, 신한독립당 비서과장, 조선지광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 사회주의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김작, 적성, 진영철, 김광우, 가네자와 히데오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922년 『독립신문』, 『신한공론』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개벽』·『조선지광』·『시대일보』 등 잡지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32년 전향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1년부터 친일단체 상해계림구락부의 기관지 『광화』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선전하였다. 1943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경재 (金瓊載)
김경재는 일제강점기 독립신문 기자, 신한독립당 비서과장, 조선지광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 사회주의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김작, 적성, 진영철, 김광우, 가네자와 히데오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922년 『독립신문』, 『신한공론』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개벽』·『조선지광』·『시대일보』 등 잡지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32년 전향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1년부터 친일단체 상해계림구락부의 기관지 『광화』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선전하였다. 1943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관현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군인·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6년 충남 논산 출생이며,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01년 귀국 후 대한제국 군부에서 활동하며 혁명일심회에 가담했으나, 쿠데타 모의 사건 발각 후 일본으로 피신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 한국어 통역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후 중추원 부찬의,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을 위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김관현 (金寬鉉)
김관현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군인·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6년 충남 논산 출생이며,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01년 귀국 후 대한제국 군부에서 활동하며 혁명일심회에 가담했으나, 쿠데타 모의 사건 발각 후 일본으로 피신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 한국어 통역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후 중추원 부찬의,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을 위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고영희는 일제강점기 주일 특명전권공사,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로 정미7적·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49년 한성 출생의 고영희는 친일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대일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탁지부 대신으로 임용되어 일본의 강제 병합기획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1910년 순종 황제를 압박해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1910년 10월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의 고문을 맡아 식민지 지배에 일조하였다. 고영희는 2004년 공포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고영희 (高永喜)
고영희는 일제강점기 주일 특명전권공사, 탁지부 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로 정미7적·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49년 한성 출생의 고영희는 친일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대일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탁지부 대신으로 임용되어 일본의 강제 병합기획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1910년 순종 황제를 압박해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1910년 10월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의 고문을 맡아 식민지 지배에 일조하였다. 고영희는 2004년 공포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김덕한은 일제강점기 봉상사 제조, 종묘서 제조, 의효전 제조 등을 역임한 관료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4년에 출생하여 1946년에 사망했다. 1894년 문과 급제하고, 1909년 『국조보감』을 완성한 공로로 훈4등 태극장을 받았다. 1918년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아버지 김학진의 남작 작위를 계승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1939년에는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신궁에서 전승기원제를 거행하고 총후 임무를 완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1940년 일본 정부로부터 축전기념장(정4위)을 받았다.
김덕한 (金德漢)
김덕한은 일제강점기 봉상사 제조, 종묘서 제조, 의효전 제조 등을 역임한 관료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4년에 출생하여 1946년에 사망했다. 1894년 문과 급제하고, 1909년 『국조보감』을 완성한 공로로 훈4등 태극장을 받았다. 1918년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아버지 김학진의 남작 작위를 계승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1939년에는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신궁에서 전승기원제를 거행하고 총후 임무를 완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1940년 일본 정부로부터 축전기념장(정4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