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장세윤"
검색결과 총 31건
정인국은 대한제국기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고, 1909년 황해도에서 의병 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까지 의군본부 의병부대의 참모장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10년 5월 일제 한국통감부의 해주 경찰에게 피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정인국 (鄭寅國)
정인국은 대한제국기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고, 1909년 황해도에서 의병 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까지 의군본부 의병부대의 참모장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10년 5월 일제 한국통감부의 해주 경찰에게 피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이춘숙은 일제강점기 1920년 4월 평안북도 일대에서 신한민국정부 수립과 선포를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11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차장·학무차장 등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총무간사, 1929년 7월 중앙상무집행위원·중앙상무위원·조사부장 등을 지냈다.
이춘숙 (李春塾)
이춘숙은 일제강점기 1920년 4월 평안북도 일대에서 신한민국정부 수립과 선포를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11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차장·학무차장 등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총무간사, 1929년 7월 중앙상무집행위원·중앙상무위원·조사부장 등을 지냈다.
전병현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중국 옌볜 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강화하여 중국 둥베이 지역 무장 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병현 (全秉鉉)
전병현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중국 옌볜 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강화하여 중국 둥베이 지역 무장 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정완은 일제강점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둥성 전구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 활동을 전개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의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부친 신익희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신정완 (申貞婉)
신정완은 일제강점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둥성 전구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 활동을 전개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의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부친 신익희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최선화는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기 한국독립당 및 한국혁명여성동맹 등에서의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중국에 망명하여 흥사단에 가입하고, 1940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3년 5월 충칭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서무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선화 (崔善嬅)
최선화는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기 한국독립당 및 한국혁명여성동맹 등에서의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중국에 망명하여 흥사단에 가입하고, 1940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3년 5월 충칭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서무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1919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에 1920년 창성 군감(郡監)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고, 임시정부의 지시를 전달하며 애국지사들에게 성금을 거두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내부 조직원의 밀고로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이다 순국하였다.
강제억 (康濟億)
일제강점기 1919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에 1920년 창성 군감(郡監)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고, 임시정부의 지시를 전달하며 애국지사들에게 성금을 거두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내부 조직원의 밀고로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이다 순국하였다.
김보연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주력하였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의정 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6년 9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준비위원으로 회원 모집과 임시정부 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김보연 (金甫淵)
김보연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주력하였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의정 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6년 9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준비위원으로 회원 모집과 임시정부 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김영선은 대한제국기 1907년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이후 일제강점기에 중국 둥베이 지역(만주)으로 망명하여 신흥학교를 수료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중국 상하이에서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군무부 위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영선 (金榮璿)
김영선은 대한제국기 1907년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이후 일제강점기에 중국 둥베이 지역(만주)으로 망명하여 신흥학교를 수료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중국 상하이에서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군무부 위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우진은 일제강점기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 김좌진의 친족으로, 1919년 3월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혀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김우진 (金宇鎭)
김우진은 일제강점기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 김좌진의 친족으로, 1919년 3월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혀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김원영은 중국 난징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김구가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여 설립한 학생훈련소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사회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10월회)에 가입하였다. 1945년 중국 국민정부의 즈장〔芷江〕 공군기지 중미혼합단(中美混合團) 공군 준위 견습관으로 배속되었다. 1945년 2월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여 웨양·헝양 등지에서 일본군 운수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김원영 (金元英)
김원영은 중국 난징의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김구가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여 설립한 학생훈련소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사회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10월회)에 가입하였다. 1945년 중국 국민정부의 즈장〔芷江〕 공군기지 중미혼합단(中美混合團) 공군 준위 견습관으로 배속되었다. 1945년 2월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여 웨양·헝양 등지에서 일본군 운수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김정묵은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대 베이징 일대에서 한인 민족운동과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 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북(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3년 네이멍구 따뚱‧바오터우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정묵 (金正默)
김정묵은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대 베이징 일대에서 한인 민족운동과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 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북(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3년 네이멍구 따뚱‧바오터우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김홍빈 (金洪斌)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민병길은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 중국 베이징 일대에서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중국 난징에서 한국혁명당 창당 및 철혈단을 창단하였다. 193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민병길 (閔丙吉)
민병길은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 중국 베이징 일대에서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중국 난징에서 한국혁명당 창당 및 철혈단을 창단하였다. 193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용각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원도 철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1930년대까지 중국 난징 등지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박용각 (朴容珏)
박용각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원도 철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1930년대까지 중국 난징 등지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박용철은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강원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4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항저우에서 재건된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여 기관지 『진광』의 발행에 관여하였다.
박용철 (朴容喆)
박용철은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강원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4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항저우에서 재건된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여 기관지 『진광』의 발행에 관여하였다.
공덕흡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대 후반 길림성 연길현 명월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대형 깃발을 들고 수많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 중국 군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공덕흡 (孔德洽)
공덕흡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대 후반 길림성 연길현 명월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대형 깃발을 들고 수많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 중국 군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병영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연길현 명동학교에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중국군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쓰러졌다. 부근의 제창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3월 하순에 순국하였다.
김병영 (金炳榮)
김병영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연길현 명동학교에 재학 중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중국군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쓰러졌다. 부근의 제창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3월 하순에 순국하였다.
김승록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길림성 봉림동 남구에 거주하며 학교에 재학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중국군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승록 (金承祿)
김승록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길림성 봉림동 남구에 거주하며 학교에 재학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중국군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종묵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길림성 연길현 구승하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일반 군중이 대거 참여한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가 이를 제지하던 중국 군경의 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순국하였다.
김종묵 (金鍾默)
김종묵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길림성 연길현 구승하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일반 군중이 대거 참여한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가 이를 제지하던 중국 군경의 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순국하였다.
김태균은 일제강점기, 중국 연변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이를 제지하던 중국 군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태균 (金泰均)
김태균은 일제강점기, 중국 연변 용정에서 일어난 3 · 13항일시위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연변 용정의 3 · 13항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한인 학생과 교직원, 군중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일본영사관으로 행진 중에 이를 제지하던 중국 군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