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국(鄭寅國)은 1858년(철종 9)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황해도 해주 군수를 지냈다.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 나철), 오기호(吳基鎬) 등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처단 계획을 추진할 때 이용태(李容兌) 등 대한제국 관료들과 함께 3,40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특히, 민형식(閔衡植) 등과 함께 권중현(權重顯)을 죽이려다 붙잡혀 이기(李沂)와 함께 진도로 유형(流刑) 7년을 받았으나, 순종 즉위 후 특사로 풀려났다.
1909년 5월 7일 황해도 평산군 탁영대에서 20여 명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금천 · 온정원 헌병분견소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1910년 3월 다시 봉기하여 황해도 평산군의 이진룡(李鎭龍)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8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황해도 평산, 금천군 등지에서 의병전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4월 황해도 신계군 등지에서 의병전을 끈질기게 지속하였다.
1910년 5월 7일에는 80여 명의 의병 대원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산, 금천군 등지에서 의병 부대의 연합을 주선하는 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밀정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평산군 온정 · 금천 헌병분견소 헌병대가 탄압을 목적으로 출동하였다. 이때 회의를 마치고 참모 이영만, 나이 어린 병사 한 명과 함께 나오다가 일본군 헌병분견소의 헌병 2명, 헌병보조원 4명과 마주쳤다. 이때 정인국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아 부하들에게 도피하라고 명령한 뒤 갖고 있던 작은 비수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그를 사로잡기 위해 달려들자 헌병에게 비수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이영만은 도주하던 중에 정인국이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격투를 벌이는 일본 헌병을 돌로 내리쳤다. 이에 다른 헌병 보조원이 총격을 가하여 두 의병은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병 탄압 주체인 한국통감부의 해주경찰서장은 1910년 5월 8일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에게 정인국의 전사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어제 폭도 거괴(巨魁) 전 군수 정인국이 각 수괴를 평산군 용산면 산중에 모아 놓고 회의 중인 것을 온정원분견소에서 수색, 체포에 나서 정인국 외 2명을 발견, 격투가 벌어져 병사 한 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마침내 정인국 외 1명을 살육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