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李容兌, 1890~1966)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추시 출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단암(檀菴)이다.
1894년에 제천군으로 이사하여 이직신 문하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1913년에는 제천군 근좌면의 면서기에 임명되었다. 1919년에는 봉양면에 개량 서당인 봉양모범서당을 설립하였고, 1920년에는 제천청년회 봉양면 지부장을 맡았으며, 1922년에는 봉양면 소작인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에는 봉양면장에 임명되었고, 산업조합을 설립해 조합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에 면장직을 사직하고, 1927년 말 서울의 대종교 남도본사로 찾아가 입교하였다.
1939년 서울에서 열린 경학원 주최 전조선유림대회에 제천군 대표로 추천되어 상경하였다가 곧바로 만주로 망명하였다. 영안현 동경성에 자리한 대종교총본사로 찾아가 대종교 3대 교주인 윤세복을 만난 후 대종교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대종교교적간행회의 총무를 맡아 대종교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대종교 탄압 사건인 임오교변에 연루되어 대종교 간부 25명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944년 6월 목단강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고 액하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주와 함께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서울에서 대표적인 대종교 지도자이자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종교적 해법을 제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