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전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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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사(功德司)는 신라시대, 불교와 관련된 관청이다. 『삼국사기』에 공덕사는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직능(職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좌우가공덕사 등의 직능과 백제 공덕부(功德寶)의 성격을 참고하였을 때 신라의 공덕사 역시 승려와 불교 사찰 등을 관할하던 관청으로 짐작된다.
공덕사 (功德司)
공덕사(功德司)는 신라시대, 불교와 관련된 관청이다. 『삼국사기』에 공덕사는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직능(職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좌우가공덕사 등의 직능과 백제 공덕부(功德寶)의 성격을 참고하였을 때 신라의 공덕사 역시 승려와 불교 사찰 등을 관할하던 관청으로 짐작된다.
대궁은 신라시대 왕성(王城)인 월성(月城) 안에 있던 정궁(正宮)이다. 국왕이 거처하던 궁으로 6부의 하나인 양부에 위치한 양궁, 사량부에 위치한 사량궁과 함께 3궁으로 불렸다. 대궁 안에 정전인 조원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각이 존재하였다.
대궁 (大宮)
대궁은 신라시대 왕성(王城)인 월성(月城) 안에 있던 정궁(正宮)이다. 국왕이 거처하던 궁으로 6부의 하나인 양부에 위치한 양궁, 사량부에 위치한 사량궁과 함께 3궁으로 불렸다. 대궁 안에 정전인 조원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각이 존재하였다.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문성왕 (文聖王)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문훈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 하서주총관, 집사부 중시 등을 지냈다. 『삼국사기』에 집사부 중시를 지낸 문훈과 동명이인이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 귀당총관에 임명되었고, 675년(문무왕 15) 9월에 중국 당나라와 벌인 천성전투(泉城戰鬪)에서 승리하였다고 나온다.
문훈 (文訓)
문훈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 하서주총관, 집사부 중시 등을 지냈다. 『삼국사기』에 집사부 중시를 지낸 문훈과 동명이인이 668년(문무왕 8) 6월 21일에 귀당총관에 임명되었고, 675년(문무왕 15) 9월에 중국 당나라와 벌인 천성전투(泉城戰鬪)에서 승리하였다고 나온다.
상수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왕경(王京)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한 주리(州吏) 또는 주리를 왕경에 머물게 하여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한 제도이다.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한 뒤 주리를 왕경에 올려 보내 여러 관청에서 근무하게 하는 제도를 정비하였다. 주리에게 상수역(上守役)의 대가로 상수리 소목전(燒木田)을 지급하였다. 상수리제도는 고려시대에 기인제도로 발전하였다.
상수리 (上守吏)
상수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왕경(王京)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한 주리(州吏) 또는 주리를 왕경에 머물게 하여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한 제도이다.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한 뒤 주리를 왕경에 올려 보내 여러 관청에서 근무하게 하는 제도를 정비하였다. 주리에게 상수역(上守役)의 대가로 상수리 소목전(燒木田)을 지급하였다. 상수리제도는 고려시대에 기인제도로 발전하였다.
선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7대(재위: 780~785) 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집사부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고, 780년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 와중에 혜공왕이 시해되자, 김경신과 김주원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에 발해의 침략과 패강지역의 안전한 치안 유지를 위해 대곡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패강진을 설치하였다.
선덕왕 (宣德王)
선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7대(재위: 780~785) 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집사부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고, 780년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 와중에 혜공왕이 시해되자, 김경신과 김주원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에 발해의 침략과 패강지역의 안전한 치안 유지를 위해 대곡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패강진을 설치하였다.
『신라국기(新羅國記)』는 당나라의 고음이 책봉사 귀숭경의 종사관으로 신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한 견문록이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신라국기』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정릉유사(貞陵遺事)』에 실었고, 『신라국기』 기록이 포함된 『정릉유사』의 일문(逸文)이 『감주집(紺珠集)』과 『설부(説郛)』에 소개되었다. 『신라국기』에는 골품제와 화랑제, 망덕사(望德寺)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신라국기 (新羅國記)
『신라국기(新羅國記)』는 당나라의 고음이 책봉사 귀숭경의 종사관으로 신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한 견문록이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신라국기』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정릉유사(貞陵遺事)』에 실었고, 『신라국기』 기록이 포함된 『정릉유사』의 일문(逸文)이 『감주집(紺珠集)』과 『설부(説郛)』에 소개되었다. 『신라국기』에는 골품제와 화랑제, 망덕사(望德寺)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약인(烙人)은 삼국시대, 신라 중고기의 근시 관직이다. 568년(진흥왕 29)에 건립한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 진흥왕이 마운령을 순행할 때에 왕을 수행한 여러 근시 관직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어가(御駕)를 끄는 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고,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공봉승사(供奉乘師)의 전신으로 이해한다.
약인 (烙人)
약인(烙人)은 삼국시대, 신라 중고기의 근시 관직이다. 568년(진흥왕 29)에 건립한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에 진흥왕이 마운령을 순행할 때에 왕을 수행한 여러 근시 관직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어가(御駕)를 끄는 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고, 궁궐의 말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공봉승사(供奉乘師)의 전신으로 이해한다.
연수유전답은 신라시대에 토지 지목으로 공연(孔烟)이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소유하고 있는 밭과 논이다. 「신라촌락문서」에 나오며, 개별 공연이 소유한 토지를 국가가 법적으로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절차를 거쳤고, 이 과정에서 영역 안의 토지는 모두 왕의 토지라고 하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의거하여 개별 공연이 소유한 토지를 연수유전답이라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수유전답은 통일신라 수취제도와 토지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연수유전답 (烟受有田畓)
연수유전답은 신라시대에 토지 지목으로 공연(孔烟)이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소유하고 있는 밭과 논이다. 「신라촌락문서」에 나오며, 개별 공연이 소유한 토지를 국가가 법적으로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절차를 거쳤고, 이 과정에서 영역 안의 토지는 모두 왕의 토지라고 하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의거하여 개별 공연이 소유한 토지를 연수유전답이라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수유전답은 통일신라 수취제도와 토지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오소경은 신라시대에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오소경은 국원소경 · 금관소경 · 서원소경 · 남원소경 · 북원소경을 말한다. 757년(경덕왕 16)에 중원경 · 김해경 · 서원경 · 남원경 · 북원경으로 고쳤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고,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과 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오소경 (五小京)
오소경은 신라시대에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이르는 5개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오소경은 국원소경 · 금관소경 · 서원소경 · 남원소경 · 북원소경을 말한다. 757년(경덕왕 16)에 중원경 · 김해경 · 서원경 · 남원경 · 북원경으로 고쳤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고,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과 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완산정은 신라시대에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에 주둔한 6정(六停)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 중고기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에 주둔한 정군단을 하주정이라 불렀다. 683년 이래 하주의 주치는 거열(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이었고, 거기에 거열정이 있었다. 685년(신문왕 5)에 거열정을 전라북도 전주시로 옮기고, 그것을 완산정이라 불렀다. 완산정에는 장군 3명을 두었고, 군관으로 대관대감, 대대감, 군사당주 등의 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완산정 (完山停)
완산정은 신라시대에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에 주둔한 6정(六停)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 중고기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에 주둔한 정군단을 하주정이라 불렀다. 683년 이래 하주의 주치는 거열(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이었고, 거기에 거열정이 있었다. 685년(신문왕 5)에 거열정을 전라북도 전주시로 옮기고, 그것을 완산정이라 불렀다. 완산정에는 장군 3명을 두었고, 군관으로 대관대감, 대대감, 군사당주 등의 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임금은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이다. 군왕(君王), 군주(君主), 주군(主君), 인군(人君), 왕(王), 왕자(王者), 나랏님, 상감마마(上監媽媽), 황제(皇帝) 등으로 불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발해에서 시호(諡號)를 왕호로 사용하였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주로 묘호(廟號)를 왕호로 사용하였다.
임금
임금은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이다. 군왕(君王), 군주(君主), 주군(主君), 인군(人君), 왕(王), 왕자(王者), 나랏님, 상감마마(上監媽媽), 황제(皇帝) 등으로 불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발해에서 시호(諡號)를 왕호로 사용하였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주로 묘호(廟號)를 왕호로 사용하였다.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 540~576) 왕이다. 재위 기간에 불교를 진흥하는 한편, 화랑도를 창설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흥왕 (眞興王)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 540~576) 왕이다. 재위 기간에 불교를 진흥하는 한편, 화랑도를 창설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4개의 순수비이다. 4개의 순수비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 4개의 석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라 부른다. 진흥왕순수비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중앙과 지방 통치제도, 국왕의 근시 기구, 정치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진흥왕 순수비 (眞興王 巡狩碑)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4개의 순수비이다. 4개의 순수비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 4개의 석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라 부른다. 진흥왕순수비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중앙과 지방 통치제도, 국왕의 근시 기구, 정치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