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고대사
개념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이칭
이칭
군왕(君王), 군주(君主), 주군(主君), 인군(人君), 왕(王), 왕자(王者), 나랏님, 상감마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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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임금은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이다. 군왕(君王), 군주(君主), 주군(主君), 인군(人君), 왕(王), 왕자(王者), 나랏님, 상감마마(上監媽媽), 황제(皇帝) 등으로 불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발해에서 시호(諡號)를 왕호로 사용하였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주로 묘호(廟號)를 왕호로 사용하였다.

정의
군주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왕호의 변천

1. 고조선 · 부여 · 삼한의 왕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조선(朝鮮)[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무당을 가리키는 당골 또는 당굴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당골이나 당굴은 유목 민족 사이에서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지고신(至高神) 또는 하늘신을 가리키는 텡그리(Tengri)에서 유래하였다.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을 의미하는 칭호였다.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정치적 수장의 구실을 겸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서기전 4세기경에 조선후(朝鮮侯)가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고조선을 침략하려 하자, 고조선의 통치자도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의 침략에 맞선 것이다. 고조선이 철기문화를 수용하여 연나라와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음을 말해 준다.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夫餘)에 군왕(君王)이 있고, 마가(馬加) · 우가(牛加) 등의 제가(諸加)가 사출도(四出道) 근처에 위치한 읍락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읍락을 다스리는 지배자를 ‘~가(加)’라고 불렀고, 이들이 다스리는 다수의 정치체가 연맹한 부여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옥저(東沃沮)와 동예(東濊)는 군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읍락을 다스리는 우두머리[長帥]를 둔 후, 읍군(邑君), 삼로(三老)라 불렀다. 삼한에서 읍락의 지배자를 신지(臣智) · 읍차(邑借) · 험측(險側) · 번예(樊濊) · 살해(殺奚)라 불렀다.

마한(馬韓)목지국(目支國)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진왕(辰王)이었는데, 마한과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삼한 전체를 대표하여 중국 군현과의 외교 교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2. 고구려와 백제의 왕호

『삼국지』 동이전에 고구려에 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왕의 동생이나 조카, 전에 왕위를 차지한 소노부(消奴部), 계루부(桂婁部) 왕실과 대대로 혼인한 절노부(絶奴部)의 지배자를 고추가(古鄒加)라 불렀다. 이들과 나머지 부(部)의 지배자를 망라하여 대가(大加)라 칭하였다. 고구려에서 읍락 또는 부를 다스리는 지배자를 ‘가(加)’라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5부가 연맹한 고구려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왕이라 불렀다.

'지안[集安] 고구려비'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태왕(國岡上太王)이라 표기하였다. 국강상은 고국원왕이 묻힌 장지(葬地)를 가리킨다. 따라서 국강상태왕은 소수림왕이 올린 시호(諡號)이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부터 태왕[대왕]이란 왕호(王號)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을 영락대왕(永樂大王), ' 충주(忠州) 고구려비'에서 장수왕을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 하였다.

백제는 마한의 백제국(伯濟國)에서 기원하였다. 3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최고 통치자를 신지라 불렀다가, 4세기에 백제가 마한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로 성장하면서 비로소 왕호를 사용하였다.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 왕을 어라하(於羅瑕)라 부르며,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鞬吉之)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라하는 상감마마와 같은 존칭으로 짐작된다. 건(鞬)은 ‘크다[大]’의 뜻이고, 길지는 왕을 뜻하는 백제어이다. 건길지는 ‘대왕(大王)’을 일컫는 칭호였다.

백제에서 개로왕 대부터 왕족이나 고위 귀족을 ‘~왕’ 또는 ‘~후’로 봉하였다. 왕후제(王侯制)의 실시는 백제 임금을 대왕이라고 칭하였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개로왕 때부터 대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 무령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에서 무령왕을 단지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 표기하였기 때문에 대왕이란 왕호를 무령왕 이후에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신라의 고유 왕호

신라는 초기에 고유 왕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에,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거서간(居西干), 제2대 남해(南解)차차웅(次次雄), 유리(儒理)에서 실성(實聖)까지 16왕을 이사금(尼師今), 눌지(訥祇)부터 지증(智證)까지 4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유리에서 흘해(乞解)까지 16왕을 이질금(尼叱今), 나물(奈勿)에서 지증까지 6왕을 마립간으로 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서간은 『삼국유사』에서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거서간은 진한말로 왕을 의미하는데, 귀인(貴人)을 가리키는 칭호라고도 한다. 차차웅은 자충(慈忠)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김대문(金大問)의 설명에 따르면, 신라말로 무당을 의미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고 한다. 차차웅이 무당의 뜻을 가진 것은 신라 초기에 남해가 제사장으로서 정치적 수장의 임무를 겸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사금은 『삼국유사』에 이질금, 치질금(齒叱今)으로 쓴다고 하였다. 김대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사금은 신라말로 잇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남해차차웅 사후에 그의 아들 유리가 잇금이 많다고 하여 사위 탈해(脫解)와 신료들이 유리를 왕위에 추대하였고, 다시 김씨 성이 일어나 박 · 석 · 김 세 성씨 가운데 치아가 많은 자, 즉 연장자(年長者)가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왕을 이사금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유리왕 때부터 훼(喙), 본피(本彼) 등의 여러 정치체가 연맹하여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하고, 연장자를 연맹체의 장으로 선출하는 전통에서 이사금이란 왕호가 유래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임금의 어원(語源)을 잇금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립간은 마수간(麻袖干), 누한(樓寒), 매금(寐錦)이라고도 한다. 누(樓)의 훈은 마루인데, 이는 등성이가 진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를 뜻하는 말로, 으뜸 또는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종(宗)의 훈인 마루와 통한다. 한(寒)은 한(邯), 한(旱)이라고도 표기하며, 간(干)과 같이 군주를 가리키는 위호(位號)이다. 결국 마립간은 간[한]을 칭하는 존재 가운데 으뜸의 간[首干]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제17대 나물부터, 『삼국사기』에는 제19대 눌지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고구려인이 신라 나물왕을 신라매금(新羅寐錦)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본서기』에서 제18대 실성왕을 파사매금(波沙寐錦)이라 표기하였다. 파사는 실성왕의 또 다른 이름인 보금(寶金)의 이표기에 해당한다. 두 사례는 나물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나물왕 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382년(나물왕 27) 전진(前秦)에 파견된 사신 위두(衛頭)는 해동(신라)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말한 사실이 중국 사서에 전해진다. 나물왕 때에 왕권과 신라의 국력이 신장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가 한층 강화되어 왕호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눌지 때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고 기술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신라 말기의 저명한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은 찬술한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 거서간 등의 고유한 왕호를 천박하고 촌스러워서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아무 왕[某王]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찬자는 최치원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았다.

4. 중국식 왕호의 사용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증왕 4년(503) 10월에 비로소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에, 503년(지증왕 4) 9월 당시 신라 임금인 지도로(至都盧)를 갈문왕이라 칭하였다. 지도로는 지증왕의 이름으로 ‘지도로(智度路)’라고 표기한다.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에, 모즉지(牟卽智)를 매금왕(寐錦王), 그의 동생인 사부지(徙夫智)를 갈문왕이라 밝혔다.

모즉지는 법흥왕의 이름이고, 사부지는 그의 동생 입종(立宗)의 본래 이름이다. 503년 10월에 지도로의 왕호를 갈문왕에서 매금왕으로 바꾼 것을 『삼국사기』에서 이때 비로소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처럼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지도로갈문왕, 훼부(喙部) · 사훼부(沙喙部) 소속 귀족, 일부 부의 지배자 등 7명을 칠왕(七王)이라 표현하였다. 5세기 후반에 만든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이 이사지왕(尒斯智王)임이 밝혀졌는데, 그는 국왕이 아니라 왕족이었다. 모두 5세기 후반 이래 왕족과 귀족, 일부 부의 지배자를 ‘~왕’이라 칭한 사실을 알려 준다.

매금왕은 왕 가운데 으뜸 왕이란 뜻이다. 5세기 후반 이래 왕족과 귀족, 일부 부의 대표는 ‘~왕’이라고 칭하면서도 신라 국왕은 마립간이라 부르다가 503년 10월에 국왕을 비로소 매금왕이라고 불렀다고 짐작된다. 이때 갈문왕은 부왕(副王)의 성격을 지녔는데, 한동안 갈문이라 부르다가 5세기 후반부터 갈문왕이라 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갈문’이란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535년(법흥왕 22)과 539년(법흥왕 26)에 작성된 '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川前里刻石) 을묘명(乙卯銘)',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追銘)'에서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이라 표기하였다. 무즉지는 모즉지의 다른 표기이다. 모두 530년 대 법흥왕 때에 매금왕이 아니라 대왕[태왕]이란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신라는 520년(법흥왕 7)에 율령을 반포하고, 528년(법흥왕 15)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531년(법흥왕 18)에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주재하는 상대등(上大等)을 설치하였다. 율령을 반포한 이래 신라는 연맹체 국가의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부체제(部體制)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530년대 매금왕에서 대왕[태왕]으로의 왕호 변천은 통치체제의 변동에 따라 국왕의 권력도 한층 더 강화되었음을 말해 준다.

5. 가야와 발해의 왕호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 소국의 군주를 한기(旱岐)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岐)는 ‘님’과 같은 존칭어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중반에 경상남도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안라국(安羅國)]의 지배자를 축지(踧支),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금관국(金官國)] 지배자를 진지렴(秦支廉)이라 불렀다고 한다. 축지와 진지렴은 신지의 다른 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어느 시기부터 가야 소국의 지배자를 한기라고 칭하였다.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에 의하면, 남제에서 479년에 가라국왕 하지(荷知)를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에 봉하였다고 한다. 대가야에서 적어도 479년에는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안라국과 금관국의 군주도 왕호를 사용하였다. 이 외의 나머지 가야 소국 군주는 562년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계속 한기라고 불렀다.

충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가야계 장경호(長頸壺)에 ‘대왕(大王)’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대가야의 왕이 대왕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토기에 새겨진 대왕을 백제왕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어 대가야에서 대왕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고 확정하여 말하기 어렵다.

발해는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이후 역대 왕의 시호도 ‘~왕’이라 지었고, 묘호는 별도로 제정하지 않았다. 『발해국기(渤海國記)』의 기록을 인용한 『영락대전(永樂大全)』에 따르면, 발해에서 일반 백성들이 왕을 ‘ 가독부(可毒夫)’라고 불렀고, 대면할 때에 ‘성(聖)’이라 하였으며, 왕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기하(基下)’라 표기하였다고 한다. ' 정혜공주묘비(貞惠公主墓碑)'와 '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에서 문왕을 중국에서 황제를 뜻하는 황상(皇上)이라 칭하였다. 발해가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지향하였음을 말해 준다.

6. 묘호와 시호의 사용

시호는 왕이 사망한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제정한 호칭이고, 묘호는 왕이 사망하여 삼년상을 마친 뒤에 죽은 왕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실 때 제정한 호칭이다. 신라의 문무왕이 선왕 김춘추(金春秋)의 묘호를 태종(太宗),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지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왕 가운데 묘호가 추봉(追封)된 유일한 사례이다.

고구려 민중왕모본왕, 고국천왕에서 고국양왕까지 9명, 안원왕양원왕, 평원왕은 왕이 묻힌 장지(葬地)를 시호로 삼은 경우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한다. ‘국강상’은 장지이고,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영토를 널리 개척하여 나라를 평안케 한 훌륭한 태왕이란 뜻이다. 광개토왕은 시호를 축약한 왕호이다.

문자명왕은 할아버지 연(璉)이 98세까지 장수하여 시호를 장수왕이라 제정하였다. 북위(北魏)는 별도로 장수왕에게 강(康)이란 시호를 지어 내려주었다. 문자명왕, 안장왕도 왕의 업적이나 특징을 고려하여 제정한 시호였다.

600년(영양왕 11)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을 편찬할 무렵에 고구려에서 시조 추모왕(鄒牟王)과 유리왕(類利王), 대해주류왕을 각기 동명성왕, 유리명왕(瑠璃明王), 대무신왕으로 추숭(追崇)하였다. 태조왕(太祖王)은 궁(宮)이 한때 고구려의 시조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시호로 짐작된다. 보장왕은 재위 기간 중 고구려가 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추봉받지 못하여 이름을 왕호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동성왕부터 무왕까지의 왕호가 시호라 한다. 무령왕 때에 처음 시호를 제정하였는데, 법왕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시호였고, 성왕과 무왕을 비롯한 나머지는 유교식 시호였다. 의자왕은 재위 기간 중 백제가 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추봉받지 못하여 이름을 왕호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이 신라 최초의 시호, 『삼국유사』에는 법흥왕이 신라 최초의 시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석문과 중국 사서 등에서 법흥왕부터 진덕왕까지 모두 생전에 사용한 왕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지증왕 또는 법흥왕이 신라 최초 시호였다고 기록한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지증왕부터 진덕왕까지의 왕호는 왕들이 재위 기간 동안 신료들이 올린 존호(尊號)의 성격에 가깝다고 짐작된다.

신라에서 문무왕이 최초로 선왕 김춘추의 시호를 무열이라 추봉하였고, 이후부터 역대 왕의 시호를 추봉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金傅)는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 경종 3년(978) 4월에 김부가 사망하자, 경종은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김부의 시호를 효애(孝哀)라고도 한다.

7. 고려의 왕호

고려시대 국왕의 일반적인 호칭은 끝에 조(祖)나 종(宗)자를 붙이는 묘호이다. 국가를 창업하거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공덕이 있는 왕에게는 조로 끝나는 묘호를 올리고, 재위 중에 덕을 베푼 왕에게는 종으로 끝나는 묘호를 올렸다.

고려의 국왕 34명 가운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올렸고, 23명은 종자를 붙이는 묘호에 추상(追上)되었다. 원의 간섭기에는 원에서 6명의 고려왕에게 제후국으로서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에서 ‘충~왕’이란 시호를 내려주었고, 별도로 묘호를 추상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였다. 우왕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시호를 받지 못하였고, 그의 아들 창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이름을 왕호로 삼은 사례에 해당한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에 공양왕이란 시호를 올렸다.

고려에서는 국왕이 사망하면 신왕이 시법(諡法)에 의거하여 묘호와 함께 시호를 추상(追上)하였다. 예를 들어 혜종은 왕건 사망 직후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란 시호와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그런데 시호는 후대에 추가로 올리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는데, 처음에 올린 시호를 초시(初諡), 추가로 올린 시호를 가시(加諡)라 부른다.

고려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국왕의 친아버지에게 묘호를 추상하였다. 성종의 친아버지 왕욱(王旭)은 대종(戴宗),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安宗)으로 추존되었다.

8. 조선의 왕호

조선시대 왕의 호칭은 조나 종, 군(君)자로 끝난다. 조 · 종 자(字)로 끝나는 왕호는 묘호이다. 태조를 비롯한 7명의 왕은 조 자로 끝나는 묘호를, 정종을 비롯한 18명의 왕은 종 자로 끝나는 묘호에 추상되었다. 반정으로 폐위되어 끝내 묘호를 받지 못한 연산군광해군은 후궁 소생의 왕자로 받은 작호(爵號)를 왕호로 삼았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창업 군주여서 묘호를 태조로 정하였다. 예종은 선왕이 국가를 재조(再造)한 공이 있다고 주장하며 세조란 묘호를 추상하였다. 처음에 선조의 묘호를 선종이라 정하였으나, 1616년(광해군 8)에 광해군이 선조로 바꾸었다. 인조병자호란의 위기를 극복한 공을 인정받아 조 자로 끝나는 묘호를 받았다.

순조는 본래 묘호가 순종이었으나, 철종이 1857년(철종 8)에 순조로 추존하였다. 영조정조 역시 본래 묘호가 영종, 정종이었으나 고종이 1889(고종 26), 1899년(고종 36)에 영조, 정조로 추존하였다.

조선 전기에 제2대 정종은 과도기의 집권자로 여겨 묘호를 추상하지 않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렸다가 1618년(숙종 7)에 이르러 정종의 묘호를 올렸다. 단종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 상왕(上王)으로 있다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 후에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숙종이 1698년에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였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국왕의 친아버지에게도 묘호를 추존하였는데, 성종 생부의 묘호는 덕종, 인조 생부는 원종, 정조 양부와 생부는 진종장조, 헌종 생부는 익종이었다.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 국왕의 친아버지를 대원군(大院君)이라 불렀는데, 오직 고종의 생부인 이하응만이 생존 시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졌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묘호 이외에 시호도 받았다. 시호는 중국 천자에게서 받은 것과 조정 신료들이 올린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중국 천자에게서 받은 시호는 두 글자였다. 반면, 신료들이 올린 시호는 6자, 8자, 12자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 8자로 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조선 국왕은 묘호와 시호 이외에 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올린 존호(尊號)도 있었다. 존호는 기본적으로 왕이 생전에 받는 이름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한 후에 생전의 공덕을 새롭게 평가하여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추상존호(追上尊號)라 부른다. 이 밖에 왕의 혼령을 모신 곳, 즉 왕의 무덤에 대해서도 각각 정해진 호칭이 존재하였는데, 이를 능호(陵號)라고 한다.

임금의 일생과 생활

1. 재위 기간과 수명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705년 동안 28명의 왕이 존재하였고, 백제는 678년 동안 31명, 신라는 992년 동안 56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태조왕과 차대왕, 신대왕은 형제이고, 태조왕은 165년 9월 119세에, 차대왕은 165년 10월 95세에, 신대왕은 179년 12월 91세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에 차대왕은 태조왕,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에 전하는 정보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태조왕과 차대왕, 신대왕의 수명은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체로 산상왕부터 보장왕까지의 재위 연도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산상왕부터 보장왕까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25.74년이다.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장수왕으로 79년이고, 가장 짧은 왕은 봉상왕과 고국양왕으로 9년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이전 기록의 기년 및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근초고왕부터 의자왕까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7.53년이다. 근초고왕 이후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위덕왕으로 45년이고, 그다음이 무왕으로 42년이다.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은 침류왕혜왕, 법왕으로 모두 2년 미만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물왕 이전 기록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나물왕부터 경순왕까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5.45년이다.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던 시기[나물왕지증왕]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27.33년, 중고기[법흥왕진덕왕]는 24.33년, 중대[무열왕혜공왕]는 16.75년, 하대[선덕왕경순왕]는 8.7년이었다.

신라왕의 평균 재위 기간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짧아진다. 하대에 평균 재위 기간이 짧아진 이유는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물왕 이후 즉위한 신라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진평왕으로 54년이다. 가장 짧은 왕은 신무왕으로 몇 개월에 불과하였다. 이 밖에 민애왕정강왕은 1년이었다.

발해는 242년 동안 15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6.13년이다. 발해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문왕으로 57년이다. 반면에 가장 짧은 왕은 대원의로 1년을 채우지 못하였다.

고려는 475년 동안 34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3.97년이다. 왕의 평균 수명은 44세인데, 무신정변 이전에는 39.3세, 이후는 49.79세였다. 고려 후기에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술의 발달 때문이다.

고려왕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왕은 충렬왕으로 73세에 사망하였고, 그다음으로 고종이 68세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고종으로 46년이고, 가장 짧은 왕은 순종으로 겨우 3개월에 불과하였다.

조선 518년 동안 27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19.19년이고, 평균 수명은 47.04세였다. 조선왕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왕은 영조로 83세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왕은 영조로서 51년 7개월이었고, 그다음이 숙종으로 45년 10개월이었다. 가장 짧은 왕은 인종으로 8개월에 불과하였다.

2. 임금의 혼인

고구려 산상왕은 형수인 고국천왕의 비(妃) 우씨(于氏)를 왕후(王后)로 삼았다. 고구려 왕실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혼인제도를 행하였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산상왕 이후 유교 이념이 보급되면서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은 사라졌다. 『삼국사기』 동이전에 의하면, 한때 절노부[연나부(椽那部)]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부터 전지왕까지 북부 소속의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하였다. 전지왕의 제2비가 해씨(解氏)였고, 이후 문주왕까지 해씨가 왕비였다. 문주왕 이후 특정 부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왕실과 혼인하는 관행을 찾을 수 없다.

신라 초기에 박 · 석 · 김 3성(姓)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였다. 이때 왕의 성과 다른 성씨가 왕비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증왕부터 진지왕까지 왕들은 대대로 모량부(牟梁部) 소속 박씨 가문과 혼인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에 의하면, 신라에서 형제의 딸이나 고모 · 이모 · 사촌 자매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왕도 근친혼을 행하였는데, 왕이 이모 · 조카 · 사촌과 혼인한 사례가 발견된다. 신문왕은 683년(신문왕 3)에 고종사촌인 김흠운(金欽運)의 딸과 재혼하였다. 이해 2월에 먼저 혼인 날짜를 정한 후에 예물을 보내고, 5월 7일에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冊封)한 다음, 궁궐로 맞아들였다.

신문왕이 보낸 예물은 비단[帛] 15수레, 쌀, 술, 기름, 꿀, 장, 메주, 포, 젓갈 133수레, 벼 150수레였다. 신문왕의 사례는 신라왕이 혼인할 때에 정기(定期)[택일], 납채(納采), 부인책봉(夫人冊封), 친영(親迎) 등의 절차를 거쳤음을 알려 준다. 이는 중대에 신라의 왕실에서 중국의 혼인제도인 친영례(親迎禮)를 수용한 것이다.

신라에서 국왕이 왕비와 이혼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성덕왕성정왕후와 이혼하며, 채색 비단 500필과 밭 200결, 벼 1만 석을 내려주고, 강신공(康申公)이 살던 옛집을 사서 주었는데, 이처럼 왕비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지급하였다.

고려 국왕 34명의 공식 배우자는 모두 135명이었다. 태조는 무려 29명과 혼인하였고, 현종의 부인은 13명, 우왕은 9명이었다. 헌종과 충목왕, 충정왕, 창왕은 왕비가 없었다. 모두 어려서 즉위하고 재위 기간도 짧아 혼인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4명의 왕을 제외하면 고려 국왕은 평균 4.5명과 혼인하였다.

태조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호족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다. 제2대 혜종과 제3대 정종도 유력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광종부터 목종까지 고려 왕실에서 근친혼을 널리 행하였다.

현종 때부터 유교 이념이 보급됨에 따라 근친혼의 비중이 줄어들고 유력 문벌귀족 가문과의 혼인이 증가하였다. 왕실과 혼인한 대표적인 가문이 안산 김씨, 인주 이씨, 정안 임씨였다. 이 가운데 인주[경원] 이씨는 문종부터 인종까지 무려 7대에 걸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원의 간섭기에 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제의 공주나 황실 여인과 혼인하였다. 원나라가 근친혼을 금지하자, 고려 왕실에서 직접 15개의 가문에 사돈을 맺을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지정하였다. 원의 간섭기에 고려 국왕은 제1비 이외의 부인을 이들 가문에서 맞아들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먼저 혼인 대상을 정하고 신부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납채를 실시하였다. 이어 혼인 날짜를 정하여 택일을 알리고, 태묘(太廟)에 태자의 혼인 사실을 고하였다. 납채 후에 신부의 집에 예물을 보내는데, 이를 납폐(納幣)라고 한다. 신부의 집에서는 혼서(婚書)를 받은 뒤 사례하는 표(表)를 올렸다.

그다음에 혼례를 치르는데, 고려에서도 친영례를 행하였다. 친영하는 날 신부의 임시 휴게소를 여정궁(麗正宮) 합문 안에 마련하였다. 신하를 여정궁에 보내 신부를 궁으로 데려오게 하여 신랑[태자]과 신부[태자비]가 서로 인사하고 침실로 들어가서 합환주를 나누는 동뢰(同牢) 의식을 치렀다.

혼례한 뒤 3일째 되는 날에 태자비는 일찍 일어나 옷을 모두 갖추어 입고, 왕궁의 내전과 왕후 앞으로 가서 배알하였는데, 이를 비조배(妃朝拜)라 한다. 이때 왕과 왕후가 태자비에게 단술을 주고 곧이어 왕이 태자비로 책봉하였다.

고려 왕비 가운데 친정의 몰락으로 폐비된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고려 국왕 가운데 과부 또는 이혼한 여자와 재혼한 경우가 있었는데, 충숙왕은 이혼한 수비권씨(壽妃權氏)와 혼인하였고, 성종비 문덕왕후, 충렬왕비 숙창원비, 충선왕비 순비허씨(順妃許氏)는 과부였다.

조선시대에 근친혼은 금지되었다. 대체로 왕실은 이성(異姓)의 명문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조선시대에 왕비와 후궁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왕비가 죽거나 폐위되면 새로 왕비를 들였는데, 재혼한 왕비를 계비(繼妃)라고 한다. 선조는 51세에 19세인 인목왕후, 인조는 44세에 15세인 장렬왕후, 영조는 66세에 15세인 정순왕후와 재혼하였다.

조선시대에 후궁은 모두 175명이었다. 조선 국왕 27명은 평균 6.4명의 후궁을 맞이하였다.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태종으로 19명이었다. 그 뒤를 이어 광해군 14명, 성종 13명, 고종 12명, 연산군과 중종은 각각 11명을 두었다. 반면, 현종, 경종, 순종은 후궁을 두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평균 7.5명, 중기에는 6.8명, 후기에는 3.5명으로 갈수록 후궁의 수가 감소하였다.

왕의 정부인인 왕비의 소생은 적자로서 아들이면 대군(大君), 딸이면 공주(公主)에 봉해졌다. 반면, 후궁 소생은 서자로서 아들이면 군(君), 딸이면 옹주(翁主)에 봉해져 차별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혼례는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된 납비의(納妃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다.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을 의혼(議婚)이라 하는데, 왕의 경우는 왕비의 간택(揀擇)이 이를 대신하였다. 왕비를 간택할 때에 15세 전후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을 공포하고, 해당 연령의 처녀를 둔 전국의 사대부 가문에서는 사주단자와 함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력을 기재한 신고서를 국가에 올렸다. 이 신고서를 처녀단자라 하였다.

왕비의 간택은 대비(大妃)가 주관하였다. 대비가 가문과 사주가 좋은 5~6명의 처녀를 후보로 간택하면 금혼령이 해제되었다. 간택은 초간(初揀), 재간(再揀), 삼간(三揀)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삼간에서 왕비를 뽑았다. 왕비에 간택된 처녀는 별궁에서 6개월 동안 왕비 수업을 받았다.

왕비가 간택되면, 혼례를 주관하는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고, 순차적으로 택일, 납채, 납폐, 고기(告期), 책비(冊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를 시행하였다.

택일은 종묘와 사직에 왕비를 들이게 되었음을 고하는 의식이고, 납채는 장차 국구(國舅)가 될 가문에 왕비로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절차를 말한다. 국왕은 대궐 정전에 나아가 정사와 부사에게 왕비로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교명문(敎命文)과 기러기를 주어 국구의 가문에 전달하게 하였다. 이때 비단 예물을 함께 보냈는데, 이를 납폐 혹은 납징(納徵)이라 한다.

고기는 왕이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이고, 책비는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으로 별궁에서 거행되었다. 명사봉영은 왕이 사신을 보내 별궁에서 대궐로 왕비를 맞이해 오는 절차로 사가의 친영에 해당한다. 이날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冕旒冠)에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다.

동뢰는 침전에서 왕과 왕비가 술과 음식을 든 다음 첫날밤을 치르는 절차이다. 이후 모든 신하에게 하례를 받는 왕비수백관하, 왕이 모든 신하와 회례하는 전하회백관, 왕비가 종친과 봉작을 받은 문무백관의 부인들에게 하례를 받는 왕비수내외명부조회 등의 하례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외에 중국 황제로부터 왕비로 책봉한다는 문서, 즉 고명장(告命狀)을 받는 절차가 더 있었다.

3. 임금의 즉위와 의례

고구려 초기에 한동안 형제 상속에 의거한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다가 제10대 산상왕 이후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정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른 시기부터 부자 상속에 의거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때 형제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여와 삼국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적장자(嫡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통일신라에서는 태자 책봉에 의한 왕위 계승 원칙이 준수되었다. 적장자 또는 태자가 없는 경우, 전왕(前王)의 유조(遺詔)에 의하거나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추대로 왕위에 올랐고, 경쟁자를 물리치거나,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신라 문무왕은 681년에 사망하며 남긴 유조에서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울 수 없으니, 태자는 곧 자신의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관 앞에서 즉위하는 의례를 구전즉위의례(柩前卽位儀禮)라 한다. 이때 대비가 신왕(新王)에게 왕의 즉위를 허락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리는 의례와 더불어 신기(神器)를 전수하는 의례가 진행되었는데, 신라에서는 천사옥대(天賜玉帶) 또는 만파식적(萬波息笛) 등이 신기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서는 즉위한 지 2년 또는 3년 안에 국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 또는 신궁(神宮)에 친히 제사하였다. 이는 신왕이 전왕의 장례를 마치고 건국 시조 또는 김씨 왕실의 시조에게 비로소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고하는 의식과 관계가 깊다. 신왕은 이를 통해 시조왕의 신성성을 취득하였음을 종교적으로 보장받게 된다고 믿었다. 이후 새로운 관리를 임명하거나 사면을 단행하고, 관리들의 관등을 올려주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즉위의례를 마무리하였다.

백제는 국왕의 동명왕 제사와 천지(天地) 제사를 즉위의례와 관련시켜 이해한다. 왕실의 시조를 기리는 동명묘배알(東明廟拜謁)을 통해 국가의 계통적 의미를 확인하고, 천지 제사를 통해서는 국가의 왕으로서의 초월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고려시대 국왕의 즉위의례는 고명(顧命), 임종, 즉위식, 반조서(頒詔書), 대사(大赦) 등의 절차를 거쳤다. 왕이 죽기 전에 태자나 종친, 고위 관료에게 나라의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를 고명이라 한다. 즉위식은 왕이 임종한 날에 특정한 장소에서 거행되었는데, 여기에서 유조가 선포되고 신왕에게 전국보(傳國寶)[[국새(國璽)]가 전달되었으며, 백관의 하례로 즉위식이 마무리되었다.

통상 고명대신이 신왕에게 전국보를 전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추대는 왕태후가 즉위 교서를 내리고 전국보를 신왕에게 전달하였다. 원의 간섭기에는 원나라에서 신왕에게 전국보를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위식 후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여러 도에서는 즉위를 축하하는 표를 올렸다. 이어 즉위 사실을 태조 및 국왕의 직계 4대친(四代親)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경령전(慶寧殿)이나 태묘(太廟)[종묘]에 알리고 길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조선시대에 왕위에 즉위하는 방식으로 선왕의 서거에 따라 왕위를 잇는 사위(嗣位), 선왕의 양보로 왕위를 잇는 선양(禪讓), 반란을 일으켜 선왕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는 반정(反正)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사위를 통한 즉위였다.

사위 의례는 성복례(成服禮)를 치른 후 선왕의 관을 모셔둔 빈전의 문밖에서 거행하였다. 사위 의례를 행할 때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상복을 벗고 종친과 문무백관은 조복(朝服)을, 신왕이나 세자는 면복(冕服)을 입었다. 장악원(掌樂署)에서는 악대를 동원하여 전정(殿庭)의 남쪽에 벌여 놓지만 상중이어서 연주는 하지 않았다.

전왕의 유교(遺敎)와 대보(大寶)[옥새(玉璽)]를 신왕에게 전달하는 의례가 끝나면, 신왕은 문에 마련된 용상, 즉 어좌에 올라 정좌하였다. 이때 모든 신하는 네 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와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례(三叩頭禮)를 행하고,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를 외치는 산호(山呼) 및 재산호(再山呼)를 외쳐 왕의 즉위를 경하하였다. 다시 사배례를 행한 후 의례를 마쳤는데, 의례를 마친 후에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중에 행해야 하는 일에 임하였다. 사위 의례를 마친 후에는 중국에 신왕의 즉위를 알리고 책봉을 요청하였다.

1897년(고종 34) 10월에 고종은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고쳤다. 대한제국 황제의 등극 의례는 1897년 10월 12일[양력]에 거행되었다.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지에 대한제국 개국을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후, 바로 그 자리에서 황제 등극 의례를 행하였다. 등극 의례는 고종이 금(金)으로 만든 어좌에 앉고, 영의정이 황제의 대례복(大禮服)인 십이장면복(十二章冕服)을 입힌 후, 황제의 옥새를 바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등극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환구단에서 하늘과 땅에 직접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 동쪽 앞의 중국 사신 숙소 남별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황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세워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따라서 환구단에서의 천지 제사는 황제국가의 상징적인 의례로 이해할 수 있다.

4. 임금의 일상생활

신라 문무왕은 자신이 즉위 이후 갖가지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다시 심한 병에 걸렸다고 언급하였다. 신문왕은 숭고한 기틀[王業]을 이어받아 지키느라 끼니마저 거르거나 잊어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기까지 중신(衆臣)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왕들이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였고, 정치와 교화에 힘쓰느라 병이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자료가 전하지 않아 신라왕들의 구체적인 하루 일과 및 1년 일정 등을 복원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국왕이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는 편전(便殿)은 후에 선인전(宣仁殿)으로 개칭된 선정전(宣政殿)이었는데, 『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왕이 편전에서 정무를 처리하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국왕은 매일 편좌(便座)에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걸상에는 자리를 깐다. 고위 관료들과 내시들이 국왕 옆에 꿇어앉아 있으며 왕지(王旨)를 내리는 것을 듣고는 차례대로 밖으로 알렸다. 대신들은 5일에 한 번 국왕을 알현하는데 정사를 의논하는 건물이 별도로 있었다.

나머지 관료들은 매월 1일과 15일을 제외하고 국왕을 4번 알현하는데 왕지를 듣고서 일을 받들 때는 문 바깥쪽에 서 있었고, 집주관(執奏官)만이 문에서 명령을 전해 주었다. 계단을 오르거나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고 무릎걸음으로 움직였다.

국왕이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은 중광전(重光殿)[강안전(康安殿)]이었다. 중광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도경』에는 건덕전(乾德殿) 뒤편에 있는 만령전(萬齡殿)이 침전(寢殿)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왕의 침실 양쪽 행랑에 줄지어 있는 방에서는 희빈(禧嬪)과 시녀들이 국왕의 침실을 삥 둘러 거처하고 있다고 한다.

고려사』와 『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국왕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국왕의 하루 일과와 1년 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편은 아니다. 반면에 조선시대는 자료가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국왕의 하루 일과와 1년 일정을 어느 정도 복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조선 전기에 국왕은 경복궁에 거처하였다.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이 국왕이 정무를 처리하는 편전이고, 강녕전(康寧殿)이 일상생활을 하던 침전이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에 거처하였는데, 편전과 침전이 선정전, 대조전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하루 일과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대비나 왕대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이 직접 인사를 올릴 수 없을 때는 대신 내시를 보냈다. 해가 뜰 무렵 왕은 신료들과 함께 학문과 정치에 관해 토론하는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조회(朝會)를 시작하는데, 왕의 공식 업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조회에는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하는 정식 조회[朝參]와 매일매일 시행하는 약식 조회[常參]가 있었다. 조참은 매월 5일, 11일, 21일, 25일 네 차례 시행하였고, 상참에는 종6품 이상의 문 · 무관이 참석하였다.

조회가 끝나면 왕은 승지를 비롯하여 공무가 있는 신료들로부터 업무를 보고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반드시 사관(史官)이 동석하여 기록하였다. 업무 보고를 받고 나면, 이어 상참에 참석하지 못한 각 행정부의 관료들을 접견하였다. 관료는 하루 5명 이하로 제한하였고, 문신은 6품 이상, 무신은 4품 이상만 접견이 가능하였다.

정오가 되면 왕은 점심을 간단히 하고, 주강(晝講)에 참석하여 학문을 익혔다. 주강 이후에는 지방관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는 신료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직한 관료들을 만났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야간에 대궐의 호위를 맡을 군사들 및 장교들, 숙직 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었다.

저녁에 왕은 먼저 석강(夕講)에 참석하고, 이후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만약 낮 동안의 업무가 밀려 있으면, 저녁식사 후에도 야간 업무를 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대비와 왕대비 등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다. 이로써 국왕의 공식적인 하루 일과가 끝을 맺었다.

조선시대 왕의 공식적인 업무 가운데 1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일도 많았다. 왕의 1년 일정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된다. 왕은 정월 초하루에 전국의 농민 및 관리들에게 새해에도 농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글을 반포하였는데, 이를 권농윤음(勸農綸音)이라 한다.

또한, 이날에 왕은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중국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예배하는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였다. 이후 종묘와 성균관에 행차한 다음,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종친들과 신료들을 만났다.

2월에 국왕은 농민들에게 농사의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궁궐 내에 있는 적전(藉田)에서 친히 밭을 가는 친경례(親耕禮)를 행하였다. 3월에 숙종 이후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궐 안에 황단(皇壇)을 설치하고, 여기에 명나라의 태조와 신종, 의종을 배향하고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여름철에 가뭄이나 홍수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제사를 지냈다. 하지가 지나고도 비가 오지 않으면 큰 가뭄으로 간주하여 대대적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이 심한 경우 왕이 직접 나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대로 홍수가 나면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왕이 봄에 친경을 하고 심은 곡물을 직접 수확하는 의례를 가을에 거행하였는데, 이를 친예례(親刈禮)라 한다. 이때 왕이 직접 낫을 들고 수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가을에 국왕은 사형수의 집행을 명령하였다.

겨울에 국왕은 도로를 수리하고 성벽을 증축하는 토목공사를 명하였으며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 이 밖에도 국왕은 국가 차원의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고, 종묘와 사직 제사를 비롯한 다양한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년 일정은 전쟁 등의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매년 반복되었다.

5. 임금의 복식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는 백제왕은 소매가 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을 쓰고 흰 가죽 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사비시대(泗沘時代) 백제왕이 신료들과 정사를 의논할 때에 입은 상복(常服)을 묘사한 것이다.

『구당서』 고려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청 · 황 · 적 · 백 · 흑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고, 흰 비단으로 만든 관을 착용하고, 흰 가죽으로 만든 좁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관과 허리띠는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진덕여왕 때부터 중국의 복식을 수용하였는데, 신라 국왕의 복식은 당나라의 황태자 또는 친왕의 복식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황제와 황태자, 친왕의 복식은 크게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상복으로 구분되었다. 제사의례와 중요한 국가 행사 때에 입은 제복은 곤면(袞冕)으로 구성되었다. 황제의 면류관은 주옥을 꿴 술인 '류(旒)'가 12개, 황태자와 친왕은 '류'가 9개였다.

옷[袞]의 경우 황제는 12개의 문장[十二章]을, 황태자와 친왕은 9개의 문장[九章]을 배치하였는데, 전자를 십이장복, 후자를 구장복이라고 한다. 특히, 해와 달, 별은 황제의 십이장복에만 배치하여 하늘과 관련된 신성한 권위를 드러냈고, 구장복에는 산과 용을 배치하였다.

조복은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의 조회, 하례를 받을 때나 황족 · 제후를 책봉할 때 입는 것으로 관과 옷으로 구성되었다. 관은 양관(梁冠), 옷은 강사포(絳紗袍)로 통칭하였다. 황제의 양관은 12마리의 매미와 24개의 량(梁)[도드라진 줄]을 배치하였는데, 이를 흔히 통천관(通天冠)이라고 한다. 황태자의 양관은 원유관(遠遊冠)이라고 하며, 9마리의 매미와 3량을 두었다.

상복은 평소에 편하게 입던 옷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전에서 집무를 볼 때 입는 옷을 말한다. 황태자 이하 신하들이 입은 옷을 공복(公服)이라고 한다. 황제는 적황(赤黃)의 도포를 입고, 황태자와 친왕은 자색 도포를 입었다.

고려 전 · 중기까지 평상시에 왕은 담황색 도포를 입었다. 이는 중국 황제가 입는 황색 도포와 같은 것이다. 고려 태조 현릉에서 발견된 태조 신상의 관이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이었는데, 평상시에 국왕이 황제의 의복을 착용하였음을 알려 준다.

고려 전 · 중기에 상복뿐만 아니라 제복과 조복 역시 중국 당나라 또는 송나라 황제의 복식과 동일하였다고 짐작된다. 다만, 송나라의 사신을 접견할 때 황태자 또는 친왕의 복식에 해당하는 자색 공복을 착용한 것은 고려가 외교 관계에서 제후국 왕의 위상에 맞는 복식을 착용하였음을 반영한다.

원의 간섭기에 왕과 관리들은 평상시에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고 몽골 옷을 입었다. 충선왕은 충렬왕 사후 복위식을 거행할 때 원나라의 제후국임을 수용하여 자색의 도포를 입었다. 이는 원의 간섭기에 국내 의례에서 제후국 왕의 복식 규정을 준수하였음을 의미한다. 제복과 조복 역시 송나라의 제후국 왕의 복식 규정을 수용하였다고 짐작된다.

조선의 역대 국왕도 제후국 왕의 복식 규정을 준수하였다. 조선시대 국왕의 복식은 면복과 조복, 상복으로 구분되었다. 면복은 면류관 곤복(袞服)을 합쳐 말하는 것으로 최고 등급의 예복을 말한다. 이것은 국왕의 즉위식을 거행할 때,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혼례를 올릴 때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할 때 입었다.

국왕은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 가례길례, 흉례 등 다양한 의례에서 머리에 9줄의 량이 있는 원유관을 쓰고 붉은색의 강사포를 입었는데, 이를 조복이라 한다. 조선시대 국왕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옷이 곤룡포(袞龍袍)였다. 이는 둥글게 말려 있는 형태[袞]의 용을 수놓은 보(補)를 붙인 의복을 말한다. 머리에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에 허리띠를 두르며, 목이 긴 가죽 신을 신었다.

조선시대 왕은 붉은색, 왕세자와 왕세손은 검푸른색의 곤룡포를 입었다. 또한, 왕은 둥근 모양의 보 안에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을 가슴과 등, 양어깨에 하나씩 총 네 개를 표현하였다. 왕세손은 네모난 모양의 보 두 개를 가슴과 등에만 부착하고, 그 안에 삼조룡을 표현하였다. 대한제국에서는 황제는 황색, 황태자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고, 오조룡 보 네 개를 부착하였다.

6. 임금의 죽음과 장례

부여와 신라, 가야에서 왕이 사망하면,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왕이 사망하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다가 지증왕이 502년(지증왕 3) 3월에 순장을 금지하였다.

『수서(隋書)』 고려전에 고구려에서 장례 기간은 3년이고, 가옥 내에 빈전(殯殿)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한원(翰苑)』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에서 장례 기간이 3년이고, 산속에 빈전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무령왕이 사망한 지 27개월이 지나 왕릉에 시신을 안치하였다고 밝혔다. 고구려도 백제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서』 신라전에 왕과 부모 및 처자의 장례 때에 1년간 상복을 입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유교식 상례(喪禮)가 수용되면서, 장례 기간이 27개월로 변경된 것으로 짐작된다. 경순왕은 927년 사망한 경애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모셔두고 시호를 경애(景哀)라 하였다. 서당은 신라 대궁의 정전인 조원전(朝元殿) 좌우에 설치한 동 · 서당 가운데 서당을 가리킨다. 신라에서 빈전을 대궐의 정전에 설치하였음을 알려 준다.

문무왕은 681년에 사망하며 남긴 유조에서 서국(西國)[인도]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고 지시하였다. 효성왕과 선덕왕, 원성왕,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도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였다.

고려 전기에 국왕이 임종한 후 곧바로 신왕의 즉위 절차가 진행되었다. 신왕의 즉위 후에 전왕의 유명(遺命)이 선포되고, 혼을 부르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어 전왕의 임종 사실과 더불어 발상(發喪)을 선포하였다. 발상이 선포되기까지는 죽은 사람의 넋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때까지 국왕의 사망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임종부터 발상이 선포될 때까지의 기간은 2일부터 7일까지 다양하였다.

발상 선포 후에 비로소 상복을 차려입고 거애(擧哀)를 시행하였다. 고려에서 일반인은 유교적 상례에 따라 3년상을 치렀다. 그런데 국왕의 장례 기간에는 국가 행사나 제사가 미루어지고, 시장을 폐쇄하였으며, 관청도 평소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국왕의 경우 장례 기간이 일반인과 같으면 국가 기능이나 행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13일에 소상(小祥)[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27일 만에 대상(大祥)[2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왕이 이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에 따라 장례 기간은 약간의 편차가 있었다. 특히, 고종부터 유교적 장례 절차를 철저하게 준수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대략 90일로 늘어났다. 장례 절차는 전왕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고려에서 국왕의 장례를 위해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 개장후릉도감(改葬厚陵都監) 등의 임시 관청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임종 시 왕세자와 대신들에게 유언을 하는데, 이를 고명이라 한다. 왕이 임종하면, 부드러운 솜을 대고 숨이 끊어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데, 이 절차를 속광례(屬纊禮)라 부른다. 임종 확인 후 내시는 왕이 평소 입던 웃옷을 메고 지붕에 올라가 왕의 몸에서 떠난 혼을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다. 이후 임종 시간과 장소 등이 발표되고, 빈전도감과 국장도감,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다.

국왕 임종 후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을 마치고 시신을 안치한 재궁(梓宮)[관]을 빈전에 봉안하였다. 빈전은 별도의 전각을 짓지 않고 기존에 있던 전각 중에서 택하여 사용하였고, 빈전 이름도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 재궁은 발인 때까지 빈전에 봉안되었다. 국왕이 임종한 지 3일째에는 대신을 보내 사직과 종묘에 국왕의 임종 사실을 알렸다. 이후 상주들이 상복을 입고 거애(擧哀)를 시작하였다.

빈전 설치 후 곧바로 신왕의 즉위식이 치러지고, 이후에 신왕은 신료들과 승하한 전왕의 묘호, 시호, 능호, 전호(殿號)[혼전((魂殿))의 전각 이름]를 정하였다.

왕이 승하한 후 5개월째 되는 날에 빈전에 봉안되어 있던 재궁을 왕의 상여인 대여(大轝)에 싣고 궁궐을 떠나 장지인 산릉으로 옮겼다. 시신을 매장하고 산릉에서 우주(虞主)[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혼전에 봉안하여 우제(虞祭)를 지냈다. 본래 천자는 아홉 번, 제후는 일곱 번 지내는데, 조선왕은 제후 왕에 해당하여 우제를 일곱 번 지냈다.

왕이 임종한 지 1년째 되는 날에 연제(練祭)를, 2년째 되는 날에 대상을 지냈다. 27개월째 되는 날에는 상복을 벗고, 신주를 종묘 정전에 봉안하였는데, 이로써 왕의 3년상이 마무리되었다. 조선시대에 국장이 끝나면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에서 각각 의궤(儀軌)를 제작하였다.

임금의 정치적 권한과 책임

1. 임금의 위상

'광개토왕릉비'에는 추모[주몽]가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주몽의 아버지라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건국 시조인 주몽을 천제[천신(天神)]의 아들 또는 손자라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자국을 천제의 후손이 다스리는 신성한 국가, 즉 천손국(天孫國)이라 자부하였다.

단군신화에서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이 천신인 환인(桓因)의 손자라 하였다. 부여와 신라, 백제, 가야에서도 건국 시조를 천신의 아들이라 인식하였다. 고대국가의 왕실에서 천신을 핏줄로 연결된 조상신으로 섬겼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과 정통성, 지배의 정당성을 왕이 천신의 후손이라는 데에서 찾아 강조하였다.

반면, 고려와 조선에서 입국(立國)의 정당성과 군주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하였던 것은 천명(天命)이었다. 중국의 천하관에 따르면, 천하(天下)는 정치적으로 천(天)을 대리해 천명을 받은 천자가 통치하는 지역을 뜻한다.

현실에서는 천명은 군주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로 구체화되어 그에 따른 정치이념이 여러 형태로 제시되었다. 나아가 천명의 소재를 확인하는 방안으로 피치자인 민의 반응을, 즉 민심을 중시하는 논리가 개발되었다. 그래서 천명의 소재 여부를 들어 선양이나 방벌(放伐)을 정당화하여 왕조 교체를 합리화하였다.

왕건과 이성계도 고려와 조선을 건국하고, 천명을 거론하며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고려와 조선시대 군주 권력의 정통성 역시 바로 천명에서 찾았다. 즉,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들은 천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신성한 혈족이어서가 아니라 천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인식한 것이다.

고려 전기에 군주는 송 · 요 관계에서는 국왕을 칭하였으나, 고려 국내에서는 천자나 황제를 칭하였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실린 궁중의례용 악곡 풍입송(風入松)에서 고려의 군주를 해동천자(海東天子), 황제라 칭하였다. 고려 군주를 부르는 호칭은 폐하(陛下)였으며, 전하(殿下)는 왕후와 왕세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고려는 3성 6부를 비롯한 관제(官制)와 공문서식에서도 황제국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고려 역시 발해와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왕국이라 자처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원의 간섭기에 고려 국왕은 원나라 제후국 왕의 위상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군주의 복식뿐만 아니라 관제 등에서도 왕국의 제도를 채택하였고, 군주를 부르는 호칭도 폐하에서 전하로, 짐(朕)에서 고(孤)로 격하하였다.

조선시대에서도 임금을 중국의 제후국 왕의 위상을 지닌 군주로 인식하였다. 임금의 복식과 관제 등은 왕국의 제도를 따랐다. 임금의 호칭 역시 왕국의 그것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1897년(고종 34) 10월 고종을 황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칭하면서, 황제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2. 임금의 정치적 권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등의 권력을 지녔다. 즉, 오늘날의 경우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서 독점할 수 없는 세 가지 권력을 왕은 독점할 수 있었다. '지안 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4~5세기 고구려에서 국왕이 내린 교령(敎令)을 기초로 법령과 법률을 제정(制定)하거나 또는 그것을 개정하였다. 신라에서는 520년(법흥왕 7)에 이전에 내린 여러 교령이나 판례 등을 정비하여 율령을 제정하였다.

6세기 전반 이전 신라에서는 국왕과 귀족, 부의 대표 등이 함께 논의하여 공동으로 교령을 반포하다가 530년대 이후 국왕 단독으로 교령을 반포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국왕의 교령에 의거하여 법령을 새롭게 제정하였거나 기존의 법령을 개정한 사례를 모아 정리한 것을 격(格)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기본적으로 율령에 의거하여 국가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필요할 때마다 판(判), 제(制), 교(敎)의 형식으로 단행법(單行法)의 성격을 지닌 법령 또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기존의 법령 또는 법률을 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법전은 왕의 명령을 모아 놓은 책자였다. 조선시대에 왕의 명령을 수교(受敎)라 하였는데, 15세기에 이들 수교 가운데 영구히 지켜야 할 것을 모아 만든 조선왕조 최초의 통일 법전이 『 경국대전(經國大典)』이었다.

1698년(숙종 24)에 1543년(중종 38) 이후부터 당시까지의 경(京) · 외(外) 각사(各司)의 수교가 많이 상실되고 마멸된 것을 보존하기 위해 『 수교집록(受敎輯錄)』을 간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수교를 모아 놓은 새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여러 법전 가운데 영조와 정조, 고종 때에 편찬한 『 속대전』, 『 대전통편』, 『 대전회통』을 최고의 법전으로 꼽는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왕은 입법권자인 동시에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고구려에서 3세기 중반에 죄인이 있으면, 제가(諸加)가 함께 논의하여 죄인을 사형에 처하고 처와 자식의 신분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다.

고구려 초기에 국왕과 부의 대표들이 모여 범죄자를 심문하고 평결(評決)하였음을 알려 준다.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한 이후에는 율령에 의하거나 반역죄를 비롯한 중죄를 범한 경우 국왕이 신료들의 도움을 받아 평결하는 것이 관례였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6세기 전반 이전에 신라에서 국왕과 귀족, 부의 대표들의 합의에 기초하여 재물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거나 죄인에 대해 평결한 내용이 전한다. 신라는 6세기 전반 이후 연맹체 국가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정비하였는데, 이후 국왕이 반역죄를 비롯한 중죄인에 대해 최종 판결하였다고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범죄인에 대한 판결은 대체로 고려율(高麗律)에 의거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죄인들을 심문하고 평결하였다. 다만, 문종 대 이후 사형죄에 해당하는 경우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하여, 최종 판결은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방 군현의 수령은 태형(笞刑)에 해당하는 죄인들에 대한 처벌과 재판을 담당하였지만, 그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죄수들에 대한 재판권은 상급 관서에서 가지고 있었다. 지방의 관찰사와 서울 형조에서는 유형(流刑) 이하의 형벌에 해당하는 죄인들을 자체적으로 처결하였지만,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오직 왕만이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는 반드시 국왕의 판결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은 행정 기구의 수반으로서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한 제반 권한을 행사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연맹체 국가 단계에 국왕과 부의 대표들이 함께 의논하여 국사를 처리하였다. 4세기 또는 6세기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정비하면서 국정 운영의 최종 결정권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대대로(大對盧) 또는 상대등(上大等)이 귀족들과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한 사항을 국왕에게 상주(上奏)하면, 국왕이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고구려 후기에 임기가 3년인 토졸(吐捽), 즉 대대로가 국사를 총괄하며, 그 직임을 잘 수행한 자는 연한에 구애를 받지 않으나, 만약 교체하는 날에 연임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서로 공격하여 이긴 자가 토졸이 되며, 국왕은 단지 궁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지키다가 이긴 자를 토졸로 임명하였다. 비록 고구려 후기에 왕권이 매우 위축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로를 비롯한 관리들의 인사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국왕에게 있었음을 알려 준다.

789년(원성왕 5)에 당에서 유학한 자옥(子玉)을 양근현[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소수(小守)로 임명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집사부(執事部)의 사(史) 모초(毛肖)가 자옥이 문적(文籍), 즉 국학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다고 논박(論駁)하였다. 원성왕은 당나라 유학생이어서 등용하여도 좋다는 집사부 시중(侍中)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자옥을 양근현 소수에 임명하였다.

통일신라에서 현에 파견된 지방 관리까지도 국왕이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통일신라에서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인사에 대한 봉박권(封駁權)을 행사하는 관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관리의 인사를 담당한 행정관서가 위화부(位和府)였다.

고려시대에 과거와 음서(蔭敍)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였다. 문반에 대한 인사는 이부(吏部)에서, 무반에 대한 인사는 병부(兵部)에서 관장하였다. 이부와 병부의 관원들은 인사기록부인 정안(政案)을 기초 자료로 관직에 대한 임용후보자를 선정하였다. 이때 근무 기간이나 고과(考課) 성적을 고려하였다.

임용후보자의 현황을 기록한 인사문서인 비목(批目)을 작성하여 국왕에게 결재를 받았는데, 결재를 받은 비목에는 국새가 찍혔다. 이를 반포하는 것을 반정(頒政)이라 한다. 반정 이후에 임명된 관리들의 고신(告身), 즉 사령서를 작성하였다.

고려시대에 1~9품의 모든 관리는 새로 관직을 받는데 하자가 없는지를 평가받는 서경(暑經)을 거쳐 관리에 임명되었다. 서경은 관리 임용에서 국왕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신료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고려시대에 어사대(御史臺)에 소속된 대관(臺官)중서문하성 낭사(郎舍)에 소속된 간관(諫官)이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경국대전』에 국왕의 법 집행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절차 등은 명시하였지만, 직접적으로 왕의 권한이나 역할을 명확하게 제시한 조항을 찾을 수 없다. 왕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가 매우 넓어 법으로 제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문반의 인사는 이조, 무반은 병조에서 관장하였다. 5품 이하의 관리는 대간의 서경을 거쳐 이조와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령하였다. 대간은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4품 이상 관리는 왕명으로 직접 임명하고, 서경을 생략하였다. 그들은 하급 관리 시절에 이미 서경을 거쳤기 때문이다. 영의정좌의정, 우의정 등은 전임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상관 이상의 관리는 사전에 반드시 국왕과 의논하여 추천하도록 하였다.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국왕은 군대의 통수권자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출동시키고 군역 자원을 징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여 외국과의 외교를 수행하였다. 외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였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국왕의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3. 임금의 책임과 반성

『삼국지』 동이전에 옛날 부여의 풍속에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 오곡이 익지 않으면,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교체해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 왕은 부여 사람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담보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교체하거나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풍년이 들 경우, 부여 사람들은 풍요를 가져다준 보답으로 왕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물로 바쳤다.

삼국시대 이래 가뭄 및 홍수 등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국왕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국가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삼국시대 이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유교적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라 국왕이 근신(勤愼)하며 마음을 닦고, 자신의 실정(失政)을 책망하며 스스로 반성하였는데, 스스로 반성하는 대표적인 행위가 화려한 정전을 피하여 정사를 돌보는 것[避正殿]과 평소에 먹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減常膳], 음악의 연주를 철폐하는 것[撤樂] 등이었다.

특히, 고려와 조선에서 가뭄이 심해 왕이 자책(自責)하며 야외에서 햇볕을 쬐며 정무를 처리하는 노좌청정(露坐聽政)의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가뭄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왕은 시정(時政)에 대한 신료들의 의견을 가감 없이 청취하여 여론을 수렴하고, 왕도(王道)를 실현하지 못한 책망의 일환으로 현인(賢人)의 천거를 독려하였다. 또한, 왕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조세와 요역을 감면하거나 죄수를 사면하여 석방하였다.

이 외에 가뭄과 홍수가 발생하면, 종묘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왕이 직접 기우제 또는 기청제를 지냈다. 특히 통일신라와 고려에서는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을 비롯한 여러 불교도량(佛敎道場)을 개설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고, 고려에서는 대궐 안의 여러 건물에서 도교 의식으로 왕이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비명횡사한 원혼이나 후손에게 제사를 받지 못한 귀신들에 대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여제(厲祭)라 한다. 여제의 시행은 조선의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까지도 왕정(王政)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위민정치(爲民政治)의 구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왕 스스로 항상 반성하며 왕도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도록 하는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선왕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새로운 국왕이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선왕들의 사례를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 국조보감(國朝寶鑑)』과 『 갱장록(羹墻錄)』을 편찬하였다.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국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가려 뽑아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이다. 『갱장록』은 정조 때에 선왕들의 업적을 정리한 것으로서 유교정치의 근본사상과 그 실천에 관한 사례를 집록(集錄)한 것이다. 국왕들은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선왕들의 훌륭한 업적을 계승하고 배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개선하려 노력하였다.

4. 여왕의 즉위와 평가

우리나라 역사에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진덕왕(眞德王), 진성왕(眞聖王)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이 여자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 신분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진평왕은 신라왕실이 석가씨족(釋迦氏族)과 같다고 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동륜태자(東輪太子) 직계 후손들을 성골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성골 신분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 짐작된다.

진평왕의 동생으로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 있었다. 이들은 진평왕이 생존할 때에 아들 없이 사망하였다. 진평왕마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성골 신분의 덕만공주(德曼公主)[선덕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덕왕 사후에 국반의 딸 진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진덕왕이 사망하면서 성골 신분의 여자마저 없어지게 되자, 진골 신분의 김춘추가 제2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신라 정강왕은 재위 1년 만인 887년 7월 5일에 사망하였는데, 이해 5월에 정강왕은 집사부 시중 준흥(俊興)에게 누이 만(曼)이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뼈대는 남자와 비슷하니 선덕과 진덕의 옛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다고 부탁하였다. 정강왕이 죽은 후에 신료들이 만을 왕위에 추대하니, 이가 바로 진성왕이다.

대체로 선덕왕과 진덕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진성왕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신라왕조가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7세기 중반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당나라 태종이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김부식은 남존여비 사상에 의거하여, 여왕을 여주(女主)로 폄하하는 한편, 신라는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언급하였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역시 여왕에 대해 김부식과 비슷하게 인식하였다.

5. 폭군과 성군

우리나라 임금 가운데 재위 중에 나라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한다든가 포악한 정치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죽인 임금이 존재하는데, 이런 임금을 흔히 폭군(暴君)이라 부른다. 고구려 모본왕은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로 삼았는데, 만약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으며,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고 한다.

봉상왕은 300년에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는 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에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부역에 지쳐 도망쳐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백제에서 499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발생하자, 신하들이 동성왕에게 창고를 열어 진휼하여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500년에 동성왕은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5장(丈)이었고,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응답을 하지 않았고,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백제 의자왕은 궁녀와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고, 좌평(佐平) 성충이 극력 간언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또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성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져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신라 진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지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혜공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다니며 노는 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져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해졌다.

이 외에 진성왕은 젊은 미남자 2, 3명을 몰래 궁궐로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 나라의 정치를 맡겼는데,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치를 하여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졌다.

후삼국시대 태봉의 왕인 궁예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신라로부터 도망하여 오는 자를 모두 죽여버렸다. 또한, 부인 강씨를 무고로 죽였고, 관료와 장수, 아전들 및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이는 경우가 많아 부양(斧壤)[지금의 강원도 평강군]과 철원(鐡圎)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고려의 대표적인 폭군은 충혜왕이다. 충혜왕은 다른 사람의 처와 첩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끌어들여 1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또한, 재물 이득에는 터럭만 한 것도 따지며 항상 경영하기를 일삼으니, 소인배가 다투어 계책을 꾸몄으며, 다른 사람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넣었고, 좋은 말로 마구간을 채웠다.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살육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죄를 무서워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연산군을 들 수 있다. 『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연산군은 만년에는 난잡해지고 주색에 빠졌으며, 포악한 정치를 크게 일삼았다. 대신 · 대간 · 시종을 거의 죽였는데, 불에 달구어 지지고 가슴을 베고 마디마디 끊고 뼈를 바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광해군도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조카들을 도륙하고 계모인 인목황후(仁穆王后)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킨 패륜적 행위, 민가 수천 호를 철거하고 창덕궁과 경덕궁을 창건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점 등을 들어 폭군으로 평가한다. 반면,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기초로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폭군과 반대로 백성을 아끼고 돌보며, 국운을 크게 일으킨 임금을 성군(聖君)이라고 한다. 고구려에서 국운을 크게 일으킨 임금으로 태조왕과 광개토왕, 장수왕을 들 수 있다. 백제는 고이왕과 근초고왕, 신라는 나물왕과 진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에서는 광종과 문종, 공민왕이 국운을 크게 일으킨 임금의 예로 들 수 있고, 조선에서는 태종과 세조, 영조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 고국천왕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고, 그가 등용한 현상(賢相) 을파소가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하게 한 결과, 그의 치세 기간 동안에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

신라 성덕왕은 707년(성덕왕 6)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자, 한 사람에게 하루 벼 3되씩 정월부터 7월까지 총 30만 500석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고, 대동강 이남의 패강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였다. 게다가 720년(성덕왕 19) 4월에 큰비가 내려 드러난 시체를 묻으라고 명령하였고, 재위 36년 동안 13번이나 죄수를 사면하여 석방해 주었다.

고려시대 성군으로 유명한 임금은 성종이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중국 당 · 송나라 제도에 따라 중앙 및 지방관제를 크게 정비하는 한편, 군사 · 교육 · 경제 등 제반 제도를 아울러 개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농, 수령지침서의 공포, 수령의 청렴, 백성의 구휼에 남다른 배려를 기울여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 세종은 한글 창제, 과학기술 육성, 영토 확장 등을 통해 민족문화의 창제 ·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신왕조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고 철저한 애민사상으로 백성을 다스린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을 수 있다.

조선 인조 때 사람인 최명길은 “공훈으로는 태조 · 태종 · 세조보다 더 큰 분이 없고, 덕행으로는 세종보다 훌륭한 분이 없지만, 이들은 연대가 멀어서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한다. 제도와 문물을 볼 수 있고, 유풍과 은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칭송하여 마지않는 분은 오직 성종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 중종실록』에는 성종은 책을 강론하고 문장을 짓는 일에는 더욱 범연히 하지 않았고, 군비를 갖추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성종을 성군으로 추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탕평책을 실시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예부흥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 위민정치를 실현한 개혁 군주 정조 역시 성군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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