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회 ()

천주교
단체
1797~1798년경,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설립한 천주교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
단체
설립 시기
1797~1798년
설립자
주문모
설립지
서울특별시
소재지
서울특별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명도회는 1797~1798년경,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설립한 천주교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이다. 1791년, 구베아 주교가 북경에 세운 명도회를 본떠 설립했으며, 조직은 회장과 육회(六會)로 구성되어 있다. 『명도회규』라는 회규가 있었으며, 여성 회원과 지방 회원도 있었다. 1801년에 주문모 신부와 회장인 정약종 등 지도급 신자들이 순교하면서 타격을 입었지만, 1846년경까지 회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01년 이후, 성직자가 없던 조선 천주교회의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정의
1797~1798년경,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설립한 천주교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
설립 목적

명도회(明道會)는 선교사로는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1791년 구베아(Gouvea, A.de, 湯士選) 주교가 북경에서 설립한 명도회(明道會)를 본떠 1797~1798년경에 서울에 세운 단체이다. 명도회란 ‘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이며,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1800년설, 그리고 1799년설도 있다.

명도회의 목적은 먼저 회원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도록 노력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주1주2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 있다.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부에게 먼저 이름을 보고[報名]한 다음 신공(神工)을 하는데, 신공은 천주교를 공부하여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1년 동안 신공이 부지런한 자는 입회가 허락되고 부지런하지 않은 자는 입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조직과 활동

명도회의 조직은 회장과 육회(六會)로 구성된다. 회장으로 정약종(丁若鍾)이 알려져 있다. 육회란 명도회의 집합 장소 6곳을 말하는데, 이중 5곳은 홍필주(洪弼周) · 홍익만(洪翼萬) · 김여행(金勵行) · 현계흠(玄啓欽) · 황사영(黃嗣永)의 집이고, 나머지 1곳은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의 회(會)는 34명, 혹은 5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3는 성모시태(聖母始胎), 즉 ‘원죄없이 잉태되신 주4 마리아’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 회를 위하여 모임이 개최되는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하는 지도자를 임명하고, 남녀가 따로 모임에 참석할 것 등 회와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들을 규정해 주었고, 『명도회규(明道會規)』와 같은 회규도 만들었다. 이것은 1801년 한신애의 집에서 『셩모시회명도회규인』, 윤현의 집에서 『明道會規』가 발견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회원들은 매달 정해진 곳에서 모임을 갖는데, 그때마다 교회의 성인(聖人)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고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종이[주보단]를 받았다.

명도회는 서울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강완숙이 양제궁(良娣宮)의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를 명도회에 가입시킨 사실에서 여성 회원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명도회의 지방 활동은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서울에서만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관련하여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에 “회원들은 물론이고 회원이 아닌 신자들도 이에 주5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1800) 가을과 겨울에 입교자가 불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와 회장 정약종 등 지도자가 모두 주6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명맥은 계속 이어졌다. 즉 1827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경언이 명도회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 1846년에 순교한 현석문이 부인과 함께 명도회 회원이었다는 것은 1846년까지는 명도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아울러 1860년대 초에는 김기호 회장이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Simeon-Francois Berneux) 주교의 권고에 따라 황해도 서흥에 명도회를 조직하기도 주7. 이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세운 명도회와는 연속성이 없었지만, 외교인을 권화(勸化)하는 단체로서의 목적은 같았다.

의의 및 평가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사목할 때에는 신부를 도와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801년 이후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던 시기에는 박해 속에서 교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황사영등추안(黃嗣永等推案)』 (1801)

단행본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분도출판사, 1980, (Dallet, C. C.))

논문

방상근, 「초기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방상근, 「《立聖母始胎明道會牧訓》과 조선 천주교회의 명도회」 (『교회사연구』 46,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주석
주1

같은 종교를 믿는 벗. 우리말샘

주2

이교(異敎)를 믿는 사람. 우리말샘

주3

‘수호성인’의 전 용어. 우리말샘

주4

이성과 한 번도 성교(性交)를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키고 있는 순결.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5

좋은 영향을 받아 생각이나 감정이 바람직하게 변하다. 우리말샘

주6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다.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일에도 쓴다. 우리말샘

주7

1866년 병인박해로 소멸되었다.

집필자
방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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