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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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개념
사람 · 가축 · 물자 등을 싣고 물에 떠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물. 선박.
이칭
이칭
선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배는 사람·가축·물자 등을 싣고 물에 떠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물로 선박이라고도 한다. 용도별로 군함·상선·어선·특수선으로 분류할 수 있다. 법규상으로 한국선과 외국선, 등록선과 부등록선, 공선과 사유선, 내항선과 외항선, 여객선과 비여객선, 국내항로선과 국제항로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추진 방법이나 선체 재료에 따라 동력선과 무동력선, 목선과 철선·강선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배를 만들어 여러 방면으로 이용해 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세계 굴지의 조선국이 되었다.

정의
사람 · 가축 · 물자 등을 싣고 물에 떠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물. 선박.
개요

배를 의미하는 한자는 무려 240여 가지에 달하여 배의 종류가 많음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는 배는 선(船) · 주선(舟船) · 선박(船舶) · 선가(船舸) 등이며, 주정(舟艇)은 작고 빠른 배, 함선(艦船)과 함정(艦艇)은 작고 큰 모든 군용선의 뜻으로 되어 있다.

용도별로 배를 분류하면 군함 · 상선 · 어선 · 특수선이 있고, 법규상 분류로는 한국선과 외국선, 등록선(登錄船)과 부등록선, 공선(公船)과 사유선(私有船), 내항선(內航船)과 외항선, 여객선과 비여객선, 국내항로선과 국제항로선 등이 있다.

운항방식에 따라서는 정기선 · 부정기선, 명령항로선(命令航路船) · 자유항로선, 자영선(自營船) · 용선(傭船) 및 원양항로선 · 근해항로선 · 연해항로선 · 평수항로선 · 내수선의 분류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배는 추진방법이나 선체재료에 따라 동력선(動力船)과 무동력선, 목선(木船)과 철선(鐵船) · 강선(鋼船)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은 나일강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 인더스강 · 황하 유역에서 물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고 배도 등장했다. 인류가 시초에 배를 움직이게 하는 데 쓴 것은 물갈퀴였다. 막대기 끝에 손바닥 모양의 평평한 토막을 매단 물갈퀴는 지금도 카누와 같은 원시형태의 배에서 사용되고 있다. 물갈퀴 다음으로 사용된 도구가 노이다.

노에는 앞뒤로 밀고 끌어당기는 서양식 노와 배의 뒤편에서 옆으로 밀고 당기는 동양식 노의 두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배에서는 동양식 노가 사용되어왔다. 인류가 인력 대신에 돛을 사용하여 바람의 힘으로 배를 추진하게 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였으며, 초기에는 노와 돛을 함께 쓴 범요선(帆橈船)의 형태였다.

인력을 완전히 탈피한 범선은 13세기 경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 범선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1801년 증기기관이 이용된 이후 19세기 초부터는 동력선이 등장하여 선박사에서 가장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배의 완전한 동력화는 19세기 후기에 프로펠러철선이 나타남으로써 성취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어 증기기관선에 이어 디젤기관선 · 증기터빈선이 늘어나고, 오늘날에 와서는 원자력선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배의 원시적 형태는 나무를 묶어 만든 뗏목배, 통나무의 가운데 부분을 파낸 통나무배, 수피(獸皮) · 목피(木皮)를 이용한 가죽배 등으로서 이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에스키모인은 현재도 나뭇가지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동물가죽을 입힌 카약(kayak)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는 나무껍질을 입힌 카누를 사용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각 지방에서는 갈대를 묶어 만든 파피루스선(papyrus boat)이 널리 이용되고 있고,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는 참대로 엮어 만든 뗏목배가 아직도 어업에 이용되고 있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아프리카 해안에서는 통나무를 깎아내어서 만든 카누가 토착민들에 의하여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인류가 사용한 배는 가죽배 · 통나무배 · 뗏목배 등 원시적인 배의 형태를 거쳐, 그 뒤 배의 골격을 만든 상태에서 이 골격에 외판과 갑판을 붙인 구조선(構造船)으로까지 발달되어 왔다. 구조선 중 나무재료에 의한 목선의 사용은 세계적으로 서기 15세기 경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어 왔으나, 19세기 초부터는 재료의 사용이 다양화되어 목철선 · 철선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후반 약 20년간 전성기를 이루다가 그 뒤로부터 현대까지 강선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배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내륙에도 하천이 많은 한반도에 살아오고 있는 우리 겨레는 일찍부터 배[舟 · 船]를 잘 만들어 여러 방면으로 이용해 왔다. 삼한시대에 이미 수로를 이용하여 중국 및 일본과 왕래하였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서로 수군(水軍)으로써 쟁패(爭覇)하는 한편 각기 해로를 통하여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와 통교를 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견당선(遣唐船)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문물을 교환하였을 뿐 아니라 청해(淸海, 지금의 완도)에 진(鎭)을 설치하여 위세를 사위에 떨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인걸을 배출하였다.

고려는 그 초기부터 대형 군선과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대형 조운선(漕運船)을 구사하고, 각종 군선을 건조하여 원나라와 합세하여 일본에 원정하였고,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500년간 유례없는 상비수군을 유지해 나가면서 판옥선(板屋船)거북선〔龜船〕등을 개발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일대 국난을 타개해 나갔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 근대식 조선업은 오로지 일본인들이 독점한 때도 있었으나 광복 후 1960년대 후반 이후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세계굴지의 근대조선국이 되었다.

한선(韓船)의 구조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배는 독특한 구조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 김방경전(金方慶傳)에 고려가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선을 만들 때에 중국식으로 만들면 공비(工費)가 더 들고 시간도 더 소요되므로 보다 공법이 간편한 고려식(高麗式)으로 서둘러 조선(造船)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1975년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배와 1984년 완도군 약산면 앞바다에서 발굴된 고려 초기의 배들이 모두 다른 나라의 옛 배와 다른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 이전 배들의 구조방식은 근래의 재래식 우리나라 배와 비슷한 점이 많아, 우리나라의 배가 예로부터 연연히 전승, 발달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재래식 배는 다른 나라의 배들과 구별해서 한선(韓船)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식 배를 정크(戎克, junk), 일본의 재래식 배를 와선(和船) 또는 야마토가다선(大和型船)이라 통칭하는 것과 대응하게 된다. [그림 1]과 [그림 2]는 최근까지 사용된 현대한선(現代韓船) 중의 어선인데, 대략적인 구조와 건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배밑’ 또는 ‘밑판’이라 불리는 저판(底板)을 꾸민다. [그림 3]에 보이는 바와 같이 두꺼운 각목을 여러 줄로 평탄하게 놓고 ‘가새[長槊]’라 이르는 기다란 사각단면의 나무토막을 관통시켜 서로를 결착한다.

② ‘삼판(杉板)’ 또는 ‘현판(舷板)’이라고도 하는 외판(外板)을 배밑 좌우에서부터 차례로 붙여 올라가서 선체가 둥그런 모양을 이루도록[그림 4]와 같은 방법으로 구부린다. 삼판끼리의 고착은[그림 5]에서와 같이, 아래쪽판에 턱을 따내고 위판이 그 위에 들어맞게 한 다음에 ‘피새[皮槊]’라고 하는 사각단면의 뾰죽한 참나무못을 관통시켜 만든다. 삼판 중에서 특히 제일 밑의 것을 부자리(不者里 : 현대 선박의 용골익판(龍骨翼板)에 해당함), 제일 위의 것을 동두틈(현대선박의 현측후판(舷側厚板)에 해당함)이라 부른다.

③ ‘이물’이라고 하는 배의 앞쪽과 ‘고물’이라 이르는 배의 뒤쪽을 횡판(橫板)으로 가로질러서 막는다. 이같은 선수부와 선미부를 ‘비우(非雨 · 鼻羽 · 飛荷 · 比牙 등)’라 이르고, 선수부의 이물비우는 둥그런 모양을 이루도록 하고, 선미부의 고물비우는 직선형으로 하여 뒤쪽으로 기울인다.

④ 배 위에 ‘멍에[駕 또는 駕木]’라고 하는 양재(梁材)를 얹는다. 멍에는[그림 2]와 [그림 6]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최상 삼판인 동두틈을 꿰뚫고 놓이는데 그 개수는 배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뱃머리에는 특히 튼튼한 선멍에 또는 덕판(德板)을 얹는다. 멍에에는 돛대가 기대어 세워진다.

⑤ 멍에 아래로는 좌우 삼판을 꿰뚫어 연결하는 ‘장쇄(長釗)’ 또는 ‘가룡목(加龍木)’이라 하는 나무를 고정한다. 장쇄는[그림 6]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삼판 한장에 한개씩 고착되어 배가 좌우로 벌어지거나 찌부러지는 것을 막는다. 그것은 자연히 선체의 간을 막는 구실을 한다.

⑥ 멍에 위에 귀틀[耳機]을 꾸며서 ‘겻집’ 또는 ‘너장’이라고 하는 마루[鋪板]를 깐다.

⑦ 고물비우에 키[舵]를 꽂고, 닻을 감아올리는 굴통도 만들어 고정한다.

⑧ 판자의 연결부에 물막이를 한다. 이 작업을 ‘대끌을 친다’ 또는 ‘밥을 친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대나무속을 긁어 손으로 비벼 나무판자의 틈새를 막고 그 위에 백회(白灰)와 오동나무기름 또는 콩기름을 섞어서 발라 가지고 선체의 수밀(水密)을 기하였다. 또한 콩기름을 끓여서 배의 삼판에 칠하는 수도 있다.

⑨ 돛을 만들어 단다. 돛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활대’라고 하는 대나무 가름대를 부착한 것으로서 중국식 돛과 그 기본형태가 같은 활대붙이 평형러그세일 (balanced stiffened lug sail)이다.

이와 같이 넓고 두꺼운 저판을 밑에 평탄하게 깔고 그 주변에 외판과 선수재 · 선미재를 세워서 서로 고착하여 선각(船殼)을 꾸미고, 그 상면에 필요한 만큼 횡량(橫梁)을 가로 붙이고 그 밑에 외판재마다 가룡목을 설치하는 기본구조방식을 취하는 한선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평저형선(平底型船)이다. 한선을 중국의 정크선과 비교하면 저판이 평탄하고 선수와 선미가 예리하지 않으며, 평면을 이룬 모양새는 서로 같으나 저판과 외판의 두께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또한, 외판의 고착방식이 중국선에서는 판자를 서로 맞대어 붙인 카벨이음(carvel joint, 平張)인 데 대하여 우리나라의 배에서는 [그림 5]와 같이 판자에 홈을 파서 겹쳐 붙인 클링커 이음(clinker joint, 鎧張)이고, 횡강력재(橫强力材)가 중국선에서는 격벽(隔壁)인 데 대하여 한선에서는 가룡목으로 되어 있다. 한선을 일본의 야마토가다선과 비교하면, 일본선의 외판이 매우 엷고 넓은 판재로 되어 있으나 한선은 두껍고 좁은 판재로 되어 있다.

한선의 발달과정

중국선 및 일본선의 구조와 선형이 다른 한선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독특하게 발달해 왔다.

① 티우: 제주도와 강원도 동해안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매우 간단한 뗏목배[筏船]가 어로작업에 쓰여지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에 야생하는 내부성(耐腐性)이 강한 상나무의 토막들을[그림 7]과 같이 모아서 만든 ‘티우’라는 뗏목배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용되어 오고 있는 원시형태의 배이지만, 평면으로 본 그 모양과 나무토막을 각형단면의 목전(木栓)을 가지고 결착한 방법이 한선구조에서 보는 저판의 모양과 거기에 사용된 장쇠를 방불하게 하는 것으로서, 티우와 한선은 형태가 아주 달라 보이지만 그 구조방법이 상통한다.

② 안압지선: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건조된 전장 5.9m의 배가 발굴되었다.[그림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기다란 목편 3개를 연결한 매우 간단한 구조이지만 후대 한선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굵은 통나무의 속을 깎아내서 만든 통나무배는 얼마 전까지 두만강이나 한강에서도 이용되었던 원시형태 배의 일종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목구조선(木構造船)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우선 통나무배를 세로로 두 조각을 내어서 중간에 판자 하나를 삽입하여 배의 너비를 넓히고 양현에 세로 판자를 붙여 배의 깊이를 늘리는 원리를 따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안압지선은 바로 그 첫 단계로서 속이 파져 있는 통나무배를 양분하여 그 중간에 판자를 하나 삽입한 목편 세 조각으로 만든 간단한 초기 단계의 반구조선(半構造船)이다. 그 결착방법은 배의 전후 자리에 각각 각형목전을 사용한 것으로서 후대의 한선과 맥이 통하고, 더욱 양쪽의 L자형 선편은 완도선(莞島船)의 구조와 상통된다.

③ 완도선: 1984년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된 배는 고려시대 11세기 중 · 후반 문종 연간(1047∼1082)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는데, 그 배는 한선구조의 기본 조건을 잘 나타내고 있다.[그림 9]와[그림 10]에서 구조를 보면, 전판은 5개의 각재를 평탄하게 깔고 구형단면의 목전을 서로 결착하였고, 외판은 턱을 만들어 겹쳐 붙인 클링커식 이음으로 되어 있다.

[그림 11]과 같이 나무쐐기를 서로 고착하며, 좌우현 외판 사이에는 가룡목이 부착된 곳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한선구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저판을 고착하는 장쇠로 볼 수 있는 각형목전이 저판재 전부를 관통하지 못하고 2∼3재씩만을 통하고 있으며, 외판에 파져 있는 턱이 충분히 깊지 못하고 외판을 결착하는 목전이 한선의 피쇠치고는 너무 유치하다.

또한 가룡목이 드문드문 불규칙하게 몇 개가 있을 뿐이며, 저판과 외판의 경계에 안압지선의 것과 동일한 L자형으로 깎아서 만든 부재(部材)가 사용되고 있는 점 등이 한선구조의 초보적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④ 고려의 일본원정선: 고려 원종 연간(1260∼1274)과 충렬왕 연간(1275∼1308)에 고려는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원정할 대함(大艦) 300척을 포함한 군용선 900척을 건조하였는데, 만일 중국 남방의 조선법에 따라 배를 만들면 비용도 많이 들거니와 예정일에 완공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원의 양해를 얻어 고려의 조선방식에 따라 배를 건조하였다.

여 · 원연합군이 일본에서 심한 태풍을 만났을 때에 중국의 군함은 모두 부서졌으나 고려의 군선은 튼튼해서 견디어 냈다. 이렇게 중국선보다 오히려 견실하면서 비용도 덜 들이고 단시일내에 건조할 수 있는 고려의 조선법은 후세의 한선구조법과 동일한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한선구조는 고려 이전부터 싹이 터서 뗏목배나 안압지선에 발현되고 더욱 고려 초기에는 완도선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 뒤 그 결함이 시정되며 더욱 발달하여 고려 중엽까지에는 일본원정선에서 보는 바와 같은 완벽한 한선구조선으로 발전되어왔다.

⑤ 새로운 구조술의 모색: 조선 초기에는 여말선초에 각종 군선과 화기를 만들어 왜구를 토벌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한선구조를 개량하는 새로운 구조술이 모색되기에 이른다. 태종세종대에 걸쳐 우리 군선의 여러 가지 결함이 지적되어 체질개선의 필요성이 제창되었다.

그 결함은 첫째, 선체가 너무 커서 지둔(遲鈍)하여 속력이 느리고 운용하기도 힘들어서 적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둘째 마르지 않은 목재와 나무못[木釘]을 써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 서둘러 시공하기 때문에 선체가 취약하고 배의 수명이 짧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중국과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선장(船匠)이나 귀화한 일본인들에게 각기 제나라의 배를 만들게 하여 시험해 보기도 하고, 배밑을 석회로 바르거나 화기(火氣)로 그을려 충해(蟲害)를 방지함으로써 배의 수명연장을 도모하다가, 1434년(세종 16)에 중국식 조선법인 ‘갑조법(甲造法)’에 따라 군선을 건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갑조법이란 외판을 이중으로 하여 철정(鐵釘)을 써서 건조한 중국 남방의 조선법이며 그에 따라 건조된 갑조선(甲造船)은 밑이 뾰죽한 첨저형선(尖底型船)인 것이 특징이다. 그와 같이 세종대에 우리나라의 독특한 한선구조법에 따라 만든 단조선(單造船:외판을 한 겹으로 쓴 배)이 속력이 느리고 수명도 짧아 중국의 갑조법을 채택하여 한선구조의 개량을 도모하였으나, 문종대에 갑조법이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아 다시 단조법(單造法)으로 복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450년(문종 1) 임금이 갑조선과 단조선의 이해장단을 하문한데 대하여, 갑조선은 과연 양장(良匠)을 얻어 정교하게 건조하면 좋으나 우리 실정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단조선은 물량과 인공이 적게 들고 보수만 잘하면 충분히 오래 쓸 수 있었다. 더욱이 조금만 모양을 고치면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에도 쓸 수가 있어, 차라리 각 도의 군선은 갑조로 하지 않고 단조로 할 것을 합의하여 불과 20년만에 한선구조법으로 복귀하였다.

다만 그것을 계기로 하여 배를 일정한 기간 동안 사용한 뒤 묵은 목정을 일체 새것으로 바꾸어 배의 수명을 연장하는 개삭법(改槊法)과 일정한 기간마다 배밑을 화기로 그을리어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煙燻法)이 정해져 우리나라의 독특한 조선법으로 정착되었다.

이 개삭과 연훈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선박보수법인데, 『경국대전』에는 군선과 조운선에 대하여 건조한 뒤 8년과 14년에 개삭과 보수를 실시하여 20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매달 배를 뭍에 올려놓고 연훈을 하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⑥ 한선구조의 정착: 문종대에 재확인이 이루어진 한선구조법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변함이 없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같은 훌륭한 배도 그 몸체는 다른 배와 다를 것이 없는 순수한 한선구조선이다. [그림 12]는 갑판 이상의 상장(上粧) 부분을 떼어 낸 조선 후기 전선(戰船)의 몸체 그림이다.

그 구조는 저판이 보이지 않지만 네모난 평탄한 평면형이고, 양현에 삼판이 7개씩 서 있으며, 선수부에 15개의 참나무판자가 세로로 붙여져 비우(飛雨)를 이루고 있고, 선체 위에 가로방향으로 멍에가 15개 부착되어 있으며, 멍에에는 그 밑으로 삼판재마다 가룡목이 삽입되어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선구조로 앞에서 설명한 현대한선과는 선수 부분의 이물비우에 판자가 세로로 세워져 있고 멍에의 개수가 많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물에 참나무판자가 세로로 붙여진 것은 군선이기 때문이고, 멍에가 많은 것은 그 위에 [그림 15]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상장을 꾸미기 위함이다. 거북선도 [그림 12]와 같은 몸체 위에 특수한 상장이 꾸며져 있다.

이상과 같이 한선은 그 독특한 구조법이 이미 고려 초기 이전에서부터 싹이 터 고려 중엽에는 중국의 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군선을 건조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였다. 또한 그것이 조선시대 초기에 더욱 다져지고 독특한 개삭법과 같은 개수방법도 가미되어서 한선구조법은 완전히 정착되어 조선 말까지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조선 말에 각종 군선과 조운선 등 주요한 배는 쓸모가 없어져 대형 한선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어염상선(漁塩商船)같은 보다 작은 배만 남아서 전승되어 오다가 그나마 20세기 초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시대별로 살펴 본 한선

고려시대 이전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종류의 배가 출현하였다. 각 시대에 출현한 대표적인 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의 배

신라시대 이전의 해상활동에 관하여는 신라 · 고구려 · 백제 등 삼국이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각기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와 통교를 하고, 특히 신라는 선부서(船府署)라는 관청을 두고 있었다는 등 옛기록이 많으나 과연 그들이 어떠한 배를 구사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말엽에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에 근거를 두고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된 장보고도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이르는 황해 횡단항로를 통하여 자유로이 중국대륙을 내왕하고, 일본 구주(九州)지방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형태의 배를 구사하였는지 분명하지 않고, 오직 돛대가 두 개 이상 달리고 갑판 위에 선실이 꾸며져 있는 평저구조선(平底構造船)이었을 것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고려시대의 배

태조의 군선: 고려시대에는 그 초기부터 군선 · 무역선 · 조운선 등 각종 선박이 모두 크게 발달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수군을 잘 이용하였는데, 그가 구사한 군선 중에는 길이가 16보(步16보는 96척)에 이르고 그 갑판 위에서 말을 달릴 수 있는 큰 배도 있었다.

② 과선(戈船): 현종대(1010∼1031)부터 숙종대(1096∼1105)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함경도에 침입해 오는 여진의 해적떼를 막기 위하여 진명(鎭溟: 지금의 德源) · 원흥진(元興鎭: 지금의 定平) 등지에 수군기지로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두고 과선이라는 군선을 배치하였다. 과선은 뱃전에 짧은 창검을 빈틈없이 꽂아놓고 적이 배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고, 선수에 철로 된 충각(衝角)을 달아 적선을 받아 깨뜨리도록 꾸민 대형 군선이다.

③ 일본원정선: 고려는 원나라와 연합하여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 일본을 정토할 때 그때마다 대형군선 300척, 쾌속군선 300척, 급수소선(汲水小船) 300척씩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고려식 조선법에 따라 만들었다. 한선구조법에 따른 그 배들의 모양은 분명치 않으나 당대의 일본인이 그린 [그림 13]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④ 초마선(哨馬船):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남도수군에 12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사용된 조운선 또는 조선은 연안해로선인 경우 초마선이라 하여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크기이고, 강선(江船)인 경우에는 평저선으로서 200석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이 초마선의 적재량은 조선 후기의 조운선과 동일하고 그 선형도 [그림 21]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이만한 배들은 동양의 재래식 주선(舟船)으로서 최대의 크기이다.

⑤ 해운선: 고려는 현종대로부터 의종대(1147∼1170)에 이르기까지 약 160년간 송나라와 화친관계를 돈독히 하며 고려의 무역선으로서 중국에 내왕한 배가 많았다. 이들 배는 그 크기가 분명하지 않으나 70여 명을 태우고 황해를 횡단한 예가 있다.

[그림 14]는 동제신주문경(銅製神舟文鏡)으로서 고려시대의 무역선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고려의 배는 크기가 군선이나 해운선이 수용인원 70∼80명, 적재용량 1,000석 정도의 규모였고, 필요에 따라 더 큰 배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조선법으로서는 중국식 조선과 한국식 조선을 다 할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한선구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전기의 배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는 대선(大船) · 중대선(中大船) · 중선(中船) · 병선(兵船) · 쾌선(快船) · 맹선(猛船) · 중맹선(中猛船) · 별선(別船) · 무군선(無軍船) · 선(船) · 추왜별맹선(追倭別猛船) · 추왜별선(追倭別船) · 왜별선(倭別船) 등 13종의 군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집계하면 〈표 1〉과 같이 모두 829척에 이른다. 이들은 여말선초에 창궐한 왜구들을 토벌, 진압하는 데 쓰여진 군선들이다.

도별\선종 大船 中大船 中船 兵船 快船 孟船 中猛船 別船 無軍船 기타
경기 11 4 30 4 47 1 97
충청 6 92 4 18 4 10 8 142
경상 285 285
전라 8 103 14 40 165
황해 41 41
강원 17 17
평안 11 30 41
함길 41 41
8 17 103 189 319 18 18 44 57 47 9 829
〈표 1〉 세종실록지리지의 군선

이 시기의 주요한 군선은 화포를 장비하고 수십 척 씩 함대를 이루어 작전을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1380년(우왕 6)에는 왜선 500척이 금강어귀 진포구(鎭浦口)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 등이 전선 100여 척을 이끌고 가서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모두 불태웠다.

1383년에 정지(鄭地)가 전함 47척으로 적선 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화포로 적을 대파하였다. 1388년(창왕 1)에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가 군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에 원정을 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표 1〉의 군선 중 대선 · 중대선 · 중선은 함대활동에 그 주축을 이루는 주력함으로 대선과 중대선은 사령관들이 탑승하고 중선은 보통 주력함이다.

중선의 탑승인원은 30명 정도이다. 별선은 중선과 동일한 크기이지만 무장이 좀 약하고 탑승인원이 약간 적은 군선이다. 무군선은 평시에는 공선(空船)으로 포구에 계류해 두었다가 유사시에만 동원하는 배로서 대부분 중선이고 약간은 중대선이다. 가장 척수가 많은 병선은 어떤 특정한 배를 지칭한 것이 아니고 여러 종류의 배를 통칭한 것이다.

쾌선은 달아나는 적을 따라잡기 위한 속력이 빠른 쾌속선이지만 그 크기는 고작 10명 정도가 탈 수 있을 정도다. 선은 보통 배를 그저 군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기타의 배들은 척수도 많지 않은 특수선들이다.

① 병조선: 병조선이라는 새로운 배가 세조대에 나타났는데, 평상시에는 조운에 사용하고 유사시에는 군용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겸용선(兼用船)이다. 1465년(세조 11) 정원이 80명인 대선, 50명인 중선, 30명인 소선 등 시작선(試作船)을 양화도(楊花渡)에 모아 왕의 임석하에 시험을 거친 뒤 성공을 거둠으로써 화려하게 등장한 배이다. 그러나 병조선은 곧 맹선으로 바뀌었다.

② 맹선: 『경국대전』에는 각 도의 군선은 모두 대맹선 · 중맹선 · 소맹선으로 선제(船制)가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조가 영세불변의 법전으로 삼고자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에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나 있는 잡다한 군선의 규격을 통일하여 만든 이른바 맹선의 제도이다. 이들 맹선은 조운에도 겸용할 수 있도록 병조선을 그대로 본뜬 배이다.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맹선의 배치상황은 〈표 2〉와 같고 총 척수는 737척으로 현역선(現役船)이라 할 수 있는 일반 맹선이 488척, 예비선이라 할 수 있는 무군맹선(無軍猛船)이 249척 있었다. 맹선의 수용인원은 대명선이 80명, 중맹선이 60명, 소맹선이 30명이고, 조운선으로서의 운반능력은 대맹선이 미곡 800석을 적재할 수 있었다.

도별\선종 大猛船 中猛船 小猛船 無軍大猛船 無軍中猛船 無軍小猛船
경기 16 20 14 7 57
충청 11 34 24 40 109
경상 20 66 105 75 266
전라 22 43 33 86 184
강원 14 2 16
황해 7 12 10 10 39
영안 2 12 9 23
평안 4 15 4 1 3 16 43
80 192 216 1 3 245 737
〈표 2〉 경국대전의 군선

맹선제는 군선 선제의 통일이라는 목적 외에도 수군 군비의 축소와 군선의 조운겸용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는 제도였다. 〈표 2〉를 〈표 1〉과 비교하면, 총 척수가 92척 감소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군선을 제외한 척수는 772척에서 488척으로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세조대에는 왜구가 완전히 진압된 지 오래되어 이와 같은 군비의 정비와 그 축소가 필요하였으며 군선의 평화적 이용으로서 조운겸용을 도모했던 것이다. 또한 명종대(1545∼1567)에 판옥선이 개발될 때까지 맹선은 군선의 기능보다는 조운에 더 유용하게 쓰여졌다.

③ 판옥선: 판옥선(板屋船)은 명종대에 개발되어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을 하고 조선 후기에 전선으로 이름이 바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투함이다. 세조대에 병조선에 바탕을 두고 선제를 통일한 맹선은 중종대부터 명종대에 걸쳐 삼포왜란(三浦倭亂) · 사량왜변(蛇梁倭變) · 을묘왜변 등 변란이 속출하였는데도 군선으로서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자 1555년(명종 10) 획기적인 신식 군함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판옥선이다.

맹선의 경우에는 선체에 병사들이 발붙이고 싸우는 발판이 되도록 갑판을 깔고 배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를 달아놓은 평선인 데 대하여, 판옥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상장을 꾸려 하체와 상장의 2층구조로 꾸민 옥선인 점이 다르다.

[그림 15]의 판옥선은 하체와 상장으로 구분이 되는데, 하체의 구조는 평탄한 저판 주위에 삼판과 이물비우 · 고물비우를 세워서 서로 고착하여 선각(船殼)을 꾸미고 그 위에 필요한 만큼 멍에를 부착해 놓은 전형적인 한선구조로서 다른 배와 차이점이 없다.

그 하체 위에 설치된 상장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멍에라고 하는 횡량의 양현 말단에 연하여 앞뒤로 길게 현란(舷欄)이라고 하는 도리나무를 놓고, 거기에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웠다.

기둥 머리에 연하여 앞뒤로 길게 현란과 평행한 패란(牌欄)이라 부르는 도리나무를 놓고, 현란과 패란 사이의 상장 측면에는 [그림 15]에서 용이 그려져 있는 부분인 참나무로 된 방패판자를 기둥에 의지하여 붙여 놓았다. 좌우현의 패란 위에는 포판인 갑판을 깔고, 그 주변에 여장(女牆)이라 이르는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갑판 중앙에 지휘소인 2층 누각을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판옥 구조에 있어서는 [그림 18]에 잘 나타나 있듯이 상장의 너비가 하체 너비보다도 넓어서 그 사이로 노를 내밀 수 있게 되어 있다. 판옥선은 종래의 군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하여 선형 · 구조 ·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아주 우월하였다.

선형상으로 판옥선은 갑판을 두 개 가지고 있는 형태이므로 노역(櫓役)을 하는 격군(格軍)은 아래 위 두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안심하고 노를 저을 수 있고, 군사들은 전투에 임하여 상갑판 위의 넓고 높은 장소에서 화포(火砲)와 궁사(弓射)가 편리하게 되어 있으며, 더욱이 선현(船舷)이 성벽처럼 높아서 적이 배에 뛰어들기 어렵다.

그것은 선현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여 배를 점령하는 접전에 능한 일본 수군의 장기(長技)를 막아내고, 활과 화기의 명중률을 높여서 사격을 위주로 하는 아군의 전법을 잘 살려주는 선형이다. 구조적으로 판옥선은 적선과 충돌하여 충파(衝破)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두려운데, 그것은 일찍부터 우리 군선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판옥선은 크기도 다른 군선을 압도할 만큼 장대(壯大)하였다.

종전의 대맹선의 정원이 80명인 데 대하여 임진왜란 때 판옥선에는 125명 이상이 탑승하였다. 저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대선은 70척, 중선은 55척, 소선은 47.5∼50척 정도였는데, 판옥선은 전장(全長)이 100척까지에 이르는 치수로 당대의 군선으로 최대급이었다. 판옥선은 이렇듯 견후장대하고 기능이 탁월하여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몇 척의 구선을 제외하면 판옥선은 조선 수군에서 전투능력을 갖춘 유일한 선종인데, 척수상으로 그 세력은 일본 수군에 비해서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 해전에 동원이 가능하였던 판옥선의 척수는 이순신이 처음으로 출동하여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임할 때에 겨우 28척이고, 제2차 출동인 당포해전(唐浦海戰) 때에 전라좌도의 배 23척, 전라우도의 배 25척, 경상우도의 배 3척 등을 합해서 51척이며, 부산에 원정할 때에 전라좌 · 우도의 배를 합하여 74척이었다. 1593년(선조 26)에 경상 · 전라 · 충청 삼도의 판옥선을 합해서 겨우 100여 척에 이르고, 가장 많이 마련해놓았을 때도 18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과세(寡勢)로써 임진년의 각 해전에서 모두 압승을 거두고 그 뒤에도 우세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매우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남아 주력함 구실을 하였는데, 이름만 전선으로 바뀌고 크기나 화력은 증강되었다. 또한 거북선 같은 특수군선은 판옥선에 본을 두고 개발되었다.

④ 거북선: 구선 또는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해인 1591년 전라좌수사에 발탁된 이순신에 의하여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각 해전에 활용된 특수군선이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는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쓸 범포(帆布) 29필을 받아들여 3월 27일 거북선의 함포사격 연습을 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포범(布帆)을 만들어 다음날 거북선을 타고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시방(試放)하는 등 서둘러 거북선을 창조하였다.

거북선은 당포해전에 처음으로 출전한 뒤 각 해전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거북선의 구조와 선형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것으로는 종합적인 것이 없고, 임진왜란 후 약 200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 16]과 [그림 17]은 권수도설(卷首圖說)에 게재되어 있는 통제영구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구선으로, 한자 694자로 된 설명문이 실려 있다.

거북선의 참모습은 임진왜란 당시의 단편적인 기록과 후세의 자료인 [그림 16]과 [그림 17], 그리고 그 설명문으로 밝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거북선은 분명히 판옥선을 교묘하게 개조해서 만든 배로서, 선체가 하체와 상장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하체는 판옥선과 같으며 동일한 한선구조이다.[그림 12] 상장의 구조는[그림 16]으로 볼 때 횡량의 양현 말단에 앞뒤 방향으로 현란을 길게 놓고, 거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연하여 현란과 평행하게 앞뒤로 길게 패란을 설치하고, 현란과 패란 사이의 측면에는 기둥 사이마다 문과 총구멍이 뚫려 있는 방패판자를 붙였으며, 상장 상면에 둥근 개판(蓋板)을 씌우고 있다. 이와 같은 상장의 구조는 [그림 17]에서 알기 쉽게 나타나 있는데, 포혈(砲穴)이 뚫려 있는 방패판과 구문(龜文)이 들어 있는 개판이 뚜렷하다.

이러한 거북선의 상장구조는 판옥선과 비교하면 측면은 동일하고 상면에 있어서 판옥선의 갑판과 누각을 제거하여 그 대신에 둥근 개판을 씌운 것이다. 이처럼 거북선과 판옥선의 구조는 동일하고, 오직 선체 상면에 거북선은 둥그런 개판을 씌우고 판옥선은 평탄한 갑판을 덮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개판을 씌우는 위치는 통제영구선은 패란 자리에, 전라좌수영구선은 여장 상단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그림 18]에서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거북선이 선체 상면을 둥그런 개판으로 덮은 이유는 노역을 하는 격군과 전투에 임하는 군사까지도 완전히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제원 주요 특성
선형 平底型帆櫓船
전장 *113척
선수재와 선미재간의 길이 83∼95척
底板의 길이 *64.8척
하체의 너비 28척 정도
상장의 너비 33척 정도
하체의 높이 *7.5척
저판부터 개판 위까지의 높이 20척 정도
왜판의 두께 *4촌
眩欄과 牌欄 사이의 높이 *4.3척
노의 수(한국식 노) *20개
下體의 간수 *24간
砲穴 좌우현 패판 *22×2개
선수부 *4개
개판 *12×2개
탑승인원 *165명
〈표 3〉 통제영구선의 주요 특성

통제영구선의 주요 특성은 〈표 3〉과 같다. 다만 이것은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정조시대의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저판의 길이가 50∼55척 이고 노는 16개보다 적으며 포혈은 좌우현에 각각 6개, 선수 · 선미에 각각 1개씩이고, 탑승인원은 125명 정도였다.

거북선의 기능은, 첫째 선체의 상면을 두꺼운 개판으로 덮고 탑승원 전원을 그 안에 수용하여 완전히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전사들이 마음놓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개판 위 전면에 빈틈없이 칼송곳을 꽂아놓아 적이 접근해서 배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셋째, 마음대로 적선에 접근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천자포(天子砲) · 지자포 · 현자포 · 황자포(黃字砲) 등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적을 제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거북선은 항상 함대의 선봉이 되어 적중에 과감히 뛰어드는 돌격선 구실을 하며, 패할 줄 모르는 적을 교란함으로써 해전을 유리하게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직접 해전에 활용된 거북선의 척수는 많지 않고 세 척뿐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거북선의 크기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 척수도 수십 척으로 늘어났다.

조선 후기의 군선

조선 후기의 군선은 〈표 4〉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전선 · 구선 · 방선(防船) · 병선 · 사후선(伺侯船) · 거도선(艍舠船) · 협선(挾船) · 추포선(追捕船) · 급수선 등이고, 그 총척수는 776척에 이른다.

도별\선조 戰 船 龜 船 防 船 兵 船 伺候船 竭短船 挾 船 追捕船 汲水船 기타
경기 4 1 10 10 16 3 9 53
충청 9 1 21 20 41 92
경상 55 9 2 66 143 探船 2 277
전라 47 3 11 51 101

船1
214
황해 2 26 9 5 21 17 23 6 小猛船1
別小船1
111
평안 6 5 12 1 1 4 29
117 14 76 161 318 25 18 23 19 5 776
〈표 4〉 조선후기의 군선

임진왜란 때의 군선편제는 주력전투함인 판옥선 1척에 소형 사후선을 1척 부속시킨 매우 단순한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전선 또는 구선 혹은 방선 등 주력함 1척에 소형 무장선인 병선 1척과 비무장 소형선인 사후선 2척을 부속시킨 4척을 단위로 한 전방병선제(戰防兵船制)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방선과 병선이 새로 등장하고 군선의 편제가 복잡하여진 것은 평화시에는 중형군선이 운용하기가 쉽고 더욱이 지방마다 지리 및 방위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구분\시대 임진왜란(1592∼1598) 광해군 7년(1615) 숙종 13년(1687) 숙종 30∼42년(1704∼1716) 각선도본 및전라우수영지
저판의 길이(척) 대선 70 72.5 90
중선 55 60∼65
소선 47.5∼50 57.5∼60 65∼73
탑승인원(명) 대선 125∼130 194
중선 178 180
소선 164 164
〈표 5〉 전선 크기의 증가

선종\시대 숙종 4년(1678) 영조 20년(1744) 영조 46년(1770) 순조 8년(1809) 순조 17년(1817)
戰船 124 117 83 90 104
龜船 5 14 40 30 18
防船 11 76 97 80 73
출전 비변사등록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船案
〈표 6〉주력군선 척수의 변천

선종\구분 船直 無上 舵工 拈手 碇手 射夫 火砲匠 砲手 좌우포도장 櫓軍 합계
統營上船 2 2 2 2 2 22 14 26 2 120 194
각도수사선(통영부선) 2 2 2 2 2 20 12 24 2 110 178
일반전선 2 2 2 2 2 18 10 24 2 100 164
統營龜船 2 2 2 2 2 14 8 24 2 100 158
일반귀선 2 2 2 2 2 14 8 24 2 90 148
〈표 7〉 숙종대 전선과 구선의 정원

① 전선과 거북선: 가장 거대한 전투함인 전선은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이 이름만 바뀐 것이다. 〈표 5〉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군선이 커지고 탑승인원도 늘어났다.[그림 15]는 매우 커진 조선 후기의 전선이다. 〈표 7〉은 1706년(숙종 32)의 수군변통절목(水軍變通節目)에서 규제된 전선과 거북선의 탑승정원이다. 거북선도 조선 후기에 주력선 구실을 하며 일반전선과 동일하게 커져 나갔다.

임진왜란 이래 거북선과 전선 중에서 가장 작은 일반전선은 선체의 구별없이 동일한 하체(下體)로 제작되고 오직 상장만이 달랐기 때문이다. 거북선의 척수는 다른 군선보다도 변동이 〈표 6〉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심하였다. 거북선의 척수가 증감한 만큼 전선의 척수가 반대로 증감하여 전선과 구선을 합한 주력함의 척수가 120∼130척으로 유지되었다.

② 병선: 병선은 전선 · 거북선 · 방선 등 주력군선에 부속되어 있는 소형무장선이고, [그림 19]에서 보는 것처럼 돛대 2개, 노 6개를 갖춘 배이다. 탑승인원은 타공(舵工) 1명, 포수(砲手) 2명, 노군(櫓軍) 14명 등 17명이었으나 그 중에는 사부(射夫) 10명, 포수 10명 등으로 무장을 강화한 것도 있다. 저판의 길이는 35∼43척 정도이다.

③ 방선: 방선은 방패선(防牌船)이라고도 하는데, 병선을 약간 크게 하여 갑판상 양현에 방패판을 세워붙인 중현전투함으로 〈표 6〉과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조 무렵부터 척수가 늘어나서 대형군선을 운용하기 어려운 서해안 황해 · 경기 · 충청의 제도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다. 탑승인원은 격군 24명, 포수 5명 등 29명인 것으로부터 격군 38명, 사부 · 포수 14명 등 55명인 것까지 다양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에 나대용(羅大用)이 창제한 창선(鎗船)도 방패선의 일종이었다.

④ 사후선: 사후선은 전선 · 구선 · 방선 · 병선 등 상급군선마다 1척씩 딸려 있는 비무장 부속선으로서 정찰과 연락 등 잡무에 쓰여지는 배이다. [그림 20]과 같은 단범선(單帆船)으로서 저판의 길이 15∼22척, 너비 8.5척, 높이 4척 정도이고, 탑승인원은 타공 1명, 노군 4명을 합하여 5명이다.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해도에는 특별히 거도선 · 협선 · 추포선이 다수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후선과 유사군용선이다. 거도선은 격군 4명에다 포수 1명을 둔 무장선이고, 협선은 격군 3명만 탑승하는 소형비무장선이며, 추포선은 중국 산둥반도에서 불법적으로 침범해 오는 중국 어선과 상선을 취체하기 위하여 특별히 배치된 배이다.

해골선(海鶻船): 〈표 4〉에서 보면 전라도에는 해골선 1척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1740년(영조 16) 전라좌수사인 전운상(田雲祥)이 제작한 특수군선으로 중국선을 모방한 배이다. 선장과 타공 각 1명, 사부와 포수 각 10명, 노군 34명 등 56명이 배치된 방선 정도의 배이다.

⑥ 탐선: 경상북도에 배치된 탐선 2척은 삼도수군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統營上船)에 직접 부속되어 있는 정탐을 주무로 하는 군선인데, 다른 전선만한 크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해운선

조선시대에는 모든 종류의 배가 연안을 떠나 먼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일관하고, 배의 크기도 제한하였으므로 군선이나 조운선 등 관선을 제외한 다른 해운선척들은 매우 보잘 것 없었다 〈표 8〉. 조운에 종사하는 배는 연해를 항행하는 해선인 조선과 강을 오르내리는 강선인 수참선(水站船)이 있는데, 그 중 조선은 대형군선을 제외하고는 가장 크고 중요한 해운선이었다.

선조\구분 길이 (척-치) 너비 (척-치)
海船 대선 42 이상 18-9 이상
중선 33-6 이상 13-6 이상
소선 18-9 이상 6-3 이상
江船 대선 50 이상 10-3 이상
중선 46 이상 9 이상
소선 41 이상 8 이상
〈표 8〉 해선과 강선의 크기
*자료 : 경국대전

관유(官有) 조선의 적재용량은 처음 600석으로 한정되다가 점차 800석, 1,000석으로 커졌는데,[그림 21]은 저판의 길이 57척, 적재용량 1,000석인 조선 후기의 조선이다. 조선은 전형적인 한선구조의 평저선형이고,[그림 12]와 같은 군선의 하체에 비하면 길이에 대한 너비와 높이의 비가 매우 크다. 조선 전기에는 군선에 의한 조운도 아주 활발하였는데, 대맹선 · 중맹선 · 소맹선 등은 조운에도 쓰여진 겸용선이다.

조선 후기에는 각 지방의 사선(私船)인 지토선(地土船)이나 각 관아와 궁가(宮家)의 소유선들도 곡물운반에 동원되었다. 한강변 거상(巨商)들이 소유한 경강사선(京江私船)이나 훈련도감이 보유한 대변선(待變船)은 그 예이다. 각 지역마다 경기선 · 호서선 · 호남선 · 영남선 · 해서선 · 관서선 · 관북선 · 관동선 등으로 불리던 지토선들 중에는 특유한 기능을 가진 것도 있었다.

그 일부는 때로 곡식을 운반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나 대부분은 어업과 상업에 쓰여진 어염상선(漁鹽商船)이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운선으로는 윤선(輪船)이 있다. 윤선은 중국의 것을 본딴 것으로서 선체 좌우현 외측에 물갈퀴가 달린 외륜(外輪)을 설치하고 그것을 선내에서 조작하여 추진하도록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윤선을 조운 등에 이용하려고 여러 번 시도한 일이 있으나 실제로는 모두 실현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쇄국정책으로 외국과의 통상이 금지되었으나 간혹 해운선을 가지고 일본에 내왕한 일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뒤에는 가끔 일본으로 통신사의 내왕을 위하여 [그림 23]및 [그림 24]와 같은 사신선(使臣船)과 복물선(卜物船)이 수시로 건조된 일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배

일제강점기의 근대식 해운과 조선은 오로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 1]과 같은 재래식 한선으로 영세적인 해운업과 어업을 운영하여 나갔다. 〈표 9〉는 관계관서에 등록된 20총톤 이상의 등부선(登簿船)이고, 〈표 10〉은 20총톤 이하의 부등부선(不登簿船)이며, 〈표 11〉은 어선척수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큰 배는 일본인이 소유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 세력에 눌려 범장해운선(帆檣海運船)이나 조선형어선(朝鮮型漁船)을 운영하는데 그쳤다. 〈표 12〉에 나타나 있는 조선업체도 모두 일본인의 소유로 그나마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였다.

연대\선종 기선 범선 합계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1910 36 7,333 36 1,163 72 8,496
1915 69 15,458 261 7,359 330 22,817
1920 95 43,322 525 17,617 620 60,939
1925 136 40,988 624 20,853 760 61,841
1930 197 54,957 692 22,905 889 77,862
1935 320 58,588 947 32,752 1,267 91,340
1940 807 114,596 1,194 51,744 2,001 166,340
〈표 9〉 일제강점기의 등부선의 변천
*주: 20총톤 이상.
*자료 : 統計年報(朝鮮總督府)

연대\선종 기선 범선 합계 연대\선종 기선 범선 합계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1910 16 151 300 2,419 316 2,570 1930 360 4,028 8,741 106,121 9,101 110,149
1915 70 668 4,422 39,255 4,492 39,923 1935 550 6,053 9,555 101,634 10,105 107,687
1920 83 919 6,414 69,683 6,497 70,602 1940 1,333 12,980 14,380 159,165 15,713 172,145
1925 187 2,179 6,918 72,985 7,105 75,164
〈표 10〉 일제강점기의 부등부선의 변천
*주: 20총톤 이하.
*자료: 統計年報(朝鮮總督府)

연대\선종 무동력선 동력선 총계
부등부선 등부선 발동기선 기선
조선형 일본형 기타
1911 13,024 9,170 3,015 839 72
49
43
286
990
1,410
2,851
43
286
990
1,410
2,850
1 13,024
1915 20,299 13,166 6,889 244 20,299
1920 26,199 14,157 11,758 284 26,242
1925 31,026 16,365 14,275 386 31,312
1930 38,051 19,419 17,980 652 39,041
1935 46,448 20,335 25,564 477 47,858
1940 56,034 20,104 35,560 321 58,885
〈표 11〉 일제강점기의 어선척수의 변천 (단위: 척)
*자료: 統計年報(朝鮮總督府).

연도\내용 조선업체수 자본금(圓) 생산척수
1912 2 45,000
1915 4 78,000 1,827
1918 15 284,530
1923 27 1,720,800
1930 33 498
1935 56 351(철제 15, 기타 336)
1940 64
〈표 12〉 일제강점기의 조선업체
*자료: 統計年報(朝鮮總督府).

현대의 배

종류

현대의 강제상선으로서는 콘테이너선 자동차운반선, 살화운반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체화물의 운반선과 유조선 · LNG선 · LPG선 · 케미컬탱커 등의 액체화물의 운반선, 대형의 객선 · 도선과 같은 여객선이 대표적으로 손꼽히고, 강제군함으로써는 전함 · 순양함 · 구축함 · 항공모함 등의 비교적 큰 함정이 손꼽힌다.

20세기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상선의 크기와 속도가 증가하면서 재화중량(DWT)이 50만 톤을 넘는 유조선이 건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말부터 세계의 조선소가 초대형화되었으며, 197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재화중량 100만톤급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한편 군함 부문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대륙간 미사일이 개발됨으로써 과거의 전함 · 순양함 등의 대형군함보다는 고속의 소형 미사일 정(艇)과 항공모함, 구축함, 원자력 잠수함 등이 많이 건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추세에 맞추어서 각종의 많은 함정이 건조되고 있다. 위의 대부분의 배는 정수압력에 의한 부력에 의해서 지지되는 배수량형의 선박이며 대형선과 속력이 낮은 배의 지지형식에 적합한 배이다.

그러나 활주형(滑走型) 선박과 같이 높은 속력의 배는 고속에 있어서의 동압력에 의한 지지로 배를 부상시켜 저항을 줄임으로써 고속선에 적합하다. 항주할 때 비교적 고속에서 양력을 발생시켜 배를 부상시키는 데에는 활주형선형 뿐만 아니라 수중익(水中翼)을 배에 붙여서 양력을 얻는 방법(수중익선), 공기백(bag)을 배의 침수부분 둘레에 설치하여 배를 부상시키는 방법(공기부양선), 쌍동선의 양현의 선체와 앞뒤에 공기백을 만들어 배의 밑바닥에 압축공기를 보내고 양현의 부력과 양현의 활주형 선저에 작용하는 동압력 등의 복합된 정적 및 동적 압력에 의해서 부상시키는 방법(표면효과선, SES)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고속선이 부상하여 흘수가 작아지면 저항이 적어져 고속선의 속력을 높이는데 크게 도움된다.

그밖에 1965년경에 구 소련에서 비행물체가 수면 가까이 항행할 때에 지면효과에 의해서 유도저항이 감쇄하고 양항비(揚抗比)가 높아지며 동력이 적어도 좋은 효율로 비행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수면 바로 위를 비행하는 큰 군용의 수면효과익선(水面效果翼船, WIG)을 개발하여 사용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고속수송시대를 지향하여 198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선박의 초고속화의 연구 및 건조가 진행되고 있으며, 속력 50노트 정도의 공기부양선(空氣浮揚船), 표면 효과선(SES), 수중익선(水中翼船) 등의 여객 200명 이상의 각종 초고속 여객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어도 건조되어 운항중에 있다.

또 비교적 대형인 초고속선은 단일 지지형식으로 얻어질 수 없으며 복합지지형식에 의해서 선체의 부상에 의한 저항 저감을 꾀하여야 한다. 일본에서는 1989년부터 1994년 사이에 속력이 50노트인 SES와 수중익의 양력(揚力)과 잠수체에 의한 부력의 복합지지형식에 의한 2종류의 초고속 콘테이너선(TSL)의 설계가 개발되어 21세기의 고속수송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20세기에는 고장력강(高張力鋼), 알루미늄합금, 유리섬유보강 플라스틱(FRP) 등 많은 선박용 재료의 개발이 활발하였으며 각종 선박에 이용되고 있다. 특히 초고속선 분야에서는 소형함정, 객선 등에 알루미늄합금과 FRP가 선호되고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길이가 263m가 되는 대형고속콘테이너선과 대형액체자연가스(LNG) 운반선이 건조되었다. 또 21세기의 초고속해상수송시대를 대비한 세계적인 초고속선 개발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의 해양연구소 선박해양공학분소에서는 수중익양력과 몰수체부력에 의한 복합지지형의 초고속콘테이너선을 개발중에 있다.

배 건조실적

일본 통치가 끝난 후 즉 2차대전 이후로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사이에 자동화 · 정보화가 많이 이루어져 배의 종류, 구조, 추진방식 등을 비롯해서 배의 설계, 건조방식, 운항방식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개혁되었다. 또 우리나라는 그 사이에 굴지의 조선공업국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배를 건조하는 능력과 그 사이에 건조된 대표적인 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광복 후 1960년대까지도 해운 · 수산 및 조선 등 해상활동은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1958년의 선복량(船腹量)은 〈표 13〉과 같이 강선(鋼船)이 237척 평균 636톤이고, 목선이 9,689척 평균 18톤에 불과하며, 조선실적도 1960년까지는 일제강점기의 수준에도 못 미쳤다[표 14].


① 강선 (1958)
선종\척 · 톤 척수 총톤수
객선 20 2,.423
화물선 48 105,536
어선 30 3,873
유조선 21 9,964
예선 2 144
관용선 33 3,780
부선 75 24,149
기타 8 874
합계 237 150,743
② 목선 (1958)
선종\척 · 톤 척수 총톤수
객선 168 8,070
화물선 기선 662 27,799
범선 1,318 19,297
어선 기선 5,020 64,243
범선 1,717 20,913
유조선 13 810
예선 89 1,494
관용선 98 2,664
부선 498 28,982
기타 106 727
합계 9,689 174,999
〈표 13〉 1958년의 선박보유량
*자료 : 교통부.

1973년에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세계 최대의 대형조선소가 건설되면서 수출선인 재화중량 26만톤급의 유조선(VLCC)이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1973년 건조실적이 국내선 29척 1만373총톤, 수출선 5척 1,635총톤이었던 것이 1974년에 수출선 20만1832총톤으로 급상승하였다.

그 뒤에 건조량이 서서히 증가하여 1981년에 100만총톤을 넘었으며, 1983년에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이 발족하고 그 사이에 대한조선공사가 시설을 확충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조선은 1980년대 초반에 세계2위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84년에 2백만 총톤을 넘었고 1990년에 3백만총톤, 그 다음해에 4백만총톤, 1994년에 5백만총톤을 돌파하였으며 1998년에 860만총톤의 선박을 건조하였다 〈표 14〉.

연도\내용 건조척수 총톤수
1945 326
1950 20 305
1955 156 2,096
1960 169 4,224
1965 13,788
1970 39,100
1975 47 430,067
1980 104 654,931
1985 106 2,796,220
1990 119 3,572,699
1995 140 5,662,777
1998 163 8,634,593
〈표 14〉 조선 실적
*자료 : 상공부, 한국조선공업협회.

우리나라의 해운선복량도 1970년경부터 급진적으로 증가하여 1972년에 100만총톤을 넘고 그 뒤 지속적으로 성장되었으며, 1976년에 2백만총톤, 1978년에 3백만총톤, 1983년에 6백만총톤을 넘었다. 1988년에 보유선복량이 7백만총톤을넘었으나 1997년에 670만총톤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폐선되는 노후선이 많으며 우리나라의 해운업의 성장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 15〉.

연도\선종 화물선 객선 유조선 기타 합계
척수 GT 척수 GT 척수 GT 척수 GT 척수 GT
1970 200 520 33 8 78 318 311 846
1972 220 597 40 9 90 422 350 1,028
1974 272 680 54 11 103 668 429 1,359
1976 331 937 54 12 119 1,092 79 25 583 2,066
1978 496 2,065 56 19 144 1,168 87 29 783 3,281
1980 589 2,633 63 22 165 1,415 115 40 932 4,110
1982 641 4,376 66 28 179 1,135 121 46 1,007 5,585
1984 658 5,161 75 40 191 1,137 149 94 1,073 6,432
1986 577 5,301 75 50 192 1,135 174 99 1,018 6,586
1988 557 5,816 65 48 191 1,180 176 96 989 7,140
1990 564 6,296 64 50 194 586 195 99 0,017 7,031
1992 523 5,868 69 62 224 780 225 107 1,041 6,817
1994 479 5,472 67 50 269 723 267 127 1,082 6,373
1996 496 6,015 80 66 304 618 343 162 1,223 6,861
〈표 15〉 등록선박(국적선)
*자료: 해양수산부.100GT이상의 강선, 어선, 관용선 및 국적취득조건부 나용선 제외

그 동안 건조된 선박의 종류는 총톤수 13만톤(재화 중량 26만톤)급의 초대형 유조선과 석유시추선을 비롯하여 정유수송선, LNG선, LPG선, 케미컬탱커, 컨테이너선, 살화운반선, 일반화물선, 다목적화물선, 목재운반선, 냉동화물선, 원유 · 광물 · 살화 겸용의 OBO선, 플랜트바아지, 잠수함을 위시한 각종 군용 특수함정, 알루미늄합금과 FRP제의 공기부양선, 쌍동선, SES 등 각종 초고속선 등 연근해 및 원양어 잡이용 각종 어선, 어획물 가공모선 등 다양하다.

조선소 수는 1998년도에 중 · 대형이 10개소이고, 소형이 58개소, 합해서 68개소이나 그 중에서 길이가 300m를 넘는 건조선거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소는 현대 · 대우 · 삼성 · 한라 · 한진 · 대동 · 현대미포 등 7개 조선소이다 〈표 16〉 〈표 17〉 〈표 18〉.

회사 척수 GT
현대 45 2,946,036
대우 28 2,163,664
삼성 30 1,959,166
한라 15 808,036
한진 16 306,860
현대미포 6 93,240
대동 11 283,100
대선 4 29,200
신아 5 31,621
기타 4 11,670
161 8,632,593
〈표 16〉 회사별 수출선 건조량 (1998년)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선종\구분 척수 GT
유조선 52 4,863,503
프로덕트캐리어 18 692,041
케미컬탱커 3 34,500
겸용선 2 125,442
벌크캐리어 22 1,162,426
일반화물선 5 74,240
콘테이너선 37 1,194,675
차량운반선 10 268,620
까스운반선 5 27,326
어선
기타 7 189,820
161 8,632,593
〈표 17〉 배종류별 수출선 건조량 (1998년)
*자료: 한국조선공업협회.

연도\내용 척수 총톤수 금액(1,000달러)
1973 5 1,635 2,003
1975 13 416,003 137,346
1978 68 617,525 543,976
1980 27 464,447 353,436
1983 63 949,392 1,826,327
1985 87 2,467,097 1,658,200
1990 86 3,209,984 2,193,169
1993 73 3,318,902 3,226,370
1995 135 5,653,231 5,048,896
1998 161 8,632,593 7,024,020
〈표 18〉 선박 수출실적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이며 세계에서 제일 큰 조선소인 현대(주)는 연간생산능력이 약 350만GT(재화중량 600만DWT)이며, 9개의 건조독크에서 대형선박 60척을 건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974년부터 1999년 6월까지 총 805척, 3650만GT(5900만 DWT)의 선박을 건조한 실적을 갖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제3독크의 크기는 길이×폭×높이=640m×92m×13.4m와 같다.

1998년 전 세계의 선박건조량은 2359만 2000GT이며, 우리나라는 28.9%인 680만GT로서 42%, 990만GT을 건조한 일본에 이어서 2위에 머물고 있으며, 17% 4백만GT를 건조한 AWES(서유럽조선협의기구)를 휠씬 앞지르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초고속화 시대를 앞두고 현재 선박의 초고속화가 진행되고 있고, 에너지 절약형 추진기관의 개발 등 배에 관한 새로운 기술개발의 수효가 많이 있는 가운데 우리들의 고급기술인력의 부족과 아직도 영세한 연구비의 타개문제가 있다. 그리고 꾸준한 연구장치의 보안으로 대형 연구시설의 활용빈도를 극대화해야하는 등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21세기의 후반이 끝나기 전에 석유자원이 고갈될 것이 예측되고 새로운 추진기관이 개발되어야 하므로, 선진국에서는 그에 대한 대비로 액체수소선의 개발에 심도 깊게 착수하고 있다. 또 초전도 전자 추진선의 개발에도 착수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273도에서 저항이 영인 초전도 자석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초전도 전자 추진 방식으로서는 초전도 전자 추진선의 추진 효율이 0.1% 이하이므로 앞으로의 개발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일본은 1993년에 초전도 전자 추진선의 개발에 성공하여 8노트의 속력으로 시운전을 한 바 있으나 아직 효율이 0.08%에 그치고 있으므로 미래의 연구에 기대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극히 소극적으로 연구소 및 대학의 일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연구지원을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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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주변의 벌선조사」(정공흔, 『제주대논문집』 15, 1987)
Korean Boats and Ships(Underwood, H. H.,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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