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8책의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이다.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구체적인 간행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영 · 정조 연간에 많이 사용된 운각활자로 간행되었기에 18세기 후반 즈음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저자의 아들 이휘지(李徽之)가 1775년(영조 51) 교서관 제조, 1779년(정조 3) 규장각 제학을 역임하였다는 사실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권1·2에 시 365수, 권36에 소차(疏箚) 71편, 권7에 계(啓) 17편, 서계(書啓) 8편, 의(議) 6편, 권8에 응제문(應製文) 23편, 책제(策題)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서(序) 2편, 제발(題跋) 3편, 잡저(雜著) 3편, 권9·10에 행장(行狀) 4편, 권1113에 시장(諡狀) 5편, 권14에 묘갈명 3편, 묘지명 3편, 묘표 3편, 신도비명 1편, 권15에 제문(祭文) 20편, 애사(哀詞) 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疏) 가운데 「청원호배향칠봉서원소(請元昊配享七峯書院疏)」에서는 생육신의 일원인 원호(元昊)를 원천석(元天錫)의 사우(祠宇)에 배향시켜 충신을 표창하는 은전을 내려달라고 주청하였다. 「진소회소(陳所懷疏)」에서는 당시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유행해 백성들이 수없이 죽고 도둑 떼들이 팔도에 득실거린다고 지적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논밭과 소를 팔아 군포 수납(軍布輸納)을 해도 부족한 큰 폐단을 개혁해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건의하였다. 「인이인엽소진변소(因李寅燁疏陳辨疏)」에서는 강화도의 방비에는 백마산 · 문수산이 가장 요긴한 곳이므로, 연차적으로 그곳에 성을 쌓고 곡식을 저장해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진안동민막소(陳安東民瘼疏)」에서는 안동이 북쪽으로는 관동에 걸쳐 있고, 서쪽으로는 서호(西湖)와 인접해 사방으로 큰 산이 둘러 있는 가운데 기름진 들이 펼쳐져 동남군(東南郡)의 중추가 된다고 상세히 기술하고, 연례적으로 참혹하게 당한 수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안동부의 대동작목(大同作木)을 제방 수축비로 지출해, 커다란 돌로 안동을 흐르는 강의 제방을 튼튼히 쌓은 다음 나무를 촘촘히 심어 제방을 보호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잡저 가운데 「호전청참진회주(胡銓請斬秦檜奏)」에서는 망국노는 가차 없이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춘추』의 의리를 역설하였다.
행장 가운데 「숙종대왕행장」은 숙종의 행적과 치적이 권9 전편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청유봉휘엄국정법계(請柳鳳輝嚴鞫正法啓)」 등 많은 계는 신임사화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