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중(士中), 호는 남애(南崖). 성완(成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희주(成希周)이고, 아버지는 감사 성세평(成世平)이며,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청백리로 뽑힌 성영(成泳)의 친형이다.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어릴 때 이미 자력으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경서·주자서를 탐독할 정도의 높은 자질을 가졌다 한다.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홍문관정자를 거쳐서 청요직인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선조 초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홍문관에서 수찬·교리·직제학을 지내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 활약하였다.
이 때 정여립(鄭汝立)의 요직임명을 반대하다가 탄핵받기도 하였다. 1583년에는 사간원 사간으로서 황정식(黃廷式)과 함께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 등을 공격하고, 이들을 비판했던 사헌부 관원들의 출사를 요청하였다. 같은 해 7월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1588년 병으로 사망하여 인천 신현(新峴)에 장례 지냈다. 편집적 성격이고 가벼운 인품으로 분란을 자주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사환(仕宦: 벼슬활동) 20년에도 전택(田宅)이 없어서 친우들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정도의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