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서·북·중부를 가리킨다.
919년(태조 2)송악(松岳)에 도읍을 정하고, 송악군과 개성군을 개주(開州)라 하면서 개주의 행정구역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에는 오부 및 그 아래의 방(坊)·이(里)가 다시 정해졌으며, 995년 개주가 개성부로 개편되어 그 관할 하에 적현(赤縣) 6현과 기현(畿縣) 7현을 두면서 적현 가운데 송악현에 소속되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에 경기(京畿)가 성립하자 이로부터 독립해 중앙의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접 예속되었고, 1024년에 이르러서는 5부·35방·344리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 동부에는 안정방(安定坊)·봉향방(奉香坊)·영창방(令昌坊)·송령방(松令坊)·양제방(楊堤坊)·창령방(倉令坊)·홍인방(弘仁坊) 등 7개 방에 70개 이가 속해 있었다.
또 남부에는 덕수방(德水坊)·덕풍방(德豐坊)·안흥방(安興坊)·덕산방(德山坊)·안신방(安申坊) 등 5개 방에 71개 이가, 서부에는 삼송방(森松坊)·오정방(五正坊)·건복방(乾福坊)·진안방(鎭安坊)·향천방(香川坊) 등 5개 방에 81개 이가 속해 있었다.
북부에는 정원방(正元坊)·법왕방(法王坊)·흥국방(興國坊)·오관방(五冠坊)·자운방(慈雲坊)·왕륜방(王輪坊)·제상방(堤上坊)·사내방(舍乃坊)·사자암방(獅子巖坊)·내천왕방(內天王坊) 등 10개 방에 47개 이가 속한다.
중부에는 남계방(南溪坊)·흥원방(興元坊)·홍도방(弘道坊)·앵계방(鸎溪坊)·유암방(由巖坊)·변양방(變羊坊)·광덕방(廣德坊)·성화방(星化坊) 등 8개 방에 75개 이가 각각 속해 있었다.
문종 때 관제가 정비되어 4품 이상의 사(使) 1인과 5품 이상의 부사 1인을 두었으며, 각 부에는 갑과권무(甲科權務)로서 녹사(錄事) 2인, 그리고 방·이에는 각각 별감과 이정(里正)을 두었다.
그런데 오부의 관원들은 경관(京官)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녹봉조(祿俸條)에는 문무반록(文武班祿)에 포함되지 않고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의 관원들과 함께 권무관록(權務官祿)에 편입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실제로 오부는 정식 관부가 되지 못하고 도감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녹사가 정8품으로 승격되었고, 1217년(고종 4)에는 관제를 개편해 판관 2인과 녹사 2인을 두었으며, 1220년에 녹사를 다시 권무로 하고 뒤에 부사를 복치하였다.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에 유수병마사를 두었는데 이와 동시에 오부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러다 1270년(원종 11)에 개경환도가 이루어지고 경기의 관제가 정비되면서 오부도 역시 회복되었다.
이때 관원으로는 사를 두지 않고 부사가 장관이 되었으며, 1287년(충렬왕 13)에는 부사가 종6품의 부령(副令)으로 개칭되었다. 1308년에는 개성부가 새로 설치되면서 이제까지 중앙정부에 직예되었던 것이 개성부 관할로 변경되었다.
1331년(충혜왕 1)에는 영이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고, 1356년(공민왕 5)의 관제개편에서는 종6품의 영과 권무직인 녹사가 주어졌다. 이후 1362년에 영이 부령으로 바뀌고, 1369년 다시 영으로 개칭되어 고려 말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도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제정된 관제에서 개경오부를 그대로 두고, 종6품의 영 1인과 권무로서 녹사 각 2인을 두었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다음해 한성부로 개칭한 뒤 이곳에 중·동·남·서·북부 등 오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관원으로는 각 부마다 종6품의 주부 1인과 종9품의 참봉 2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