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근 ()

천주교
인물
해방 이후 가톨릭대학 학장, 명동성당신부 등에 서임된 사제. 신부, 교육자, 교회음악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7년
사망 연도
1980년
출생지
충청북도 단양
목차
정의
해방 이후 가톨릭대학 학장, 명동성당신부 등에 서임된 사제. 신부, 교육자, 교회음악가.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북도 단양(丹陽) 출신. 4세 때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했다가 11세 때 다시 인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을조(소신학교)를 거쳐 1938년에 용산예수성심신학교(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에 의하여 학교가 폐쇄되자, 덕원신학교로 옮겨 남은 기간을 수료하고 1944년에 신부가 되었다. 명동 본당 보좌로 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문근은 1945년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 교수로 임명되어 종교음악을 강의하다가 1949년 로마 교황청 음악대학에 유학하여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가톨릭대학 교수를 거쳐 가톨릭대학 학장을 역임한 뒤 천호동·아현동·명동·후암동·한강·양재동 등 서울지역 본당신부로 재직하였다. 1980년 8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가 되었으나 1달 뒤인 9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업적은 가톨릭성가집의 집대성과 가톨릭성가의 토착화라 할 수 있다. 덕원수도원이 1938년에 간행한 성가집의 성가들과 자작곡 5곡을 4부합창으로 개편하여 1948년에 『가톨릭성가집』을 편집, 출판하였다. 그리고 1957년 주교회의가 통일성가집을 발간할 것을 결정하고 그를 발간위원회 대표로 임명하자, 그는 1948년판 『가톨릭성가집』을 근간으로 하고 1951년판 『대구대교구성가집』의 성가들과 라틴어성가들을 보강하여 1957년에 『정선가톨릭성가집』을 발행하였다. 여기에는 한글성가 124곡과 라틴어성가 58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77년 10월에는 『회갑기념작품집』을 간행하였다.

한편, 가톨릭성가를 작곡하면서 전례음악의 토착화 문제에 골몰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작곡한 3편의 미사곡을 살펴보면, 물론 향토음악의 가락·리듬·악기를 성가에 무조건 도입하는 것을 시기상조로 판단하고 있지만, 그레고리안 화성법에 바탕을 두고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가미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재즈음악이나 팝송을 전례음악에 도입시킬 것인가를 두고, 외국의 예를 따라 이들을 수용하기보다 한국음악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뚜렷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구 전례음악의 무조건적인 답습에서는 벗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문근신부의 생애와 음악」(차인현, 『최석우신부화갑기념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한국천주교회의 성가집에 대한 고찰」(김대붕, 『한국교회사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집필자
장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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