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李迪)의 본관은 강양(江陽, 지금의 합천), 자는 윤지(允之)이다. 고조할아버지부는 판도사(版圖司) 판서(判書)를 지낸 이운호(李云皓)이고, 아버지 이백손(李伯孫)은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을 지냈다. 어머니는 광양현감(光陽縣監) 강행(姜行)의 딸이다. 7형제 중 셋째이다. 부인은 안악이씨(安岳李氏)이다.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큰아들 이도남(李圖南)은 1516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53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까지 이르게 되었다. 65세에 죽었다.
전적(典籍)을 지냈던 외삼촌 강문회(姜文會)에게서 글을 배우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1513년(중종 8)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교서관 정자와 교서관 교리 등의 관직을 지냈다.
1518년 교서관 정자로 있는 동안 성격과 능력의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523년 중종이 이적을 다시 교서관 교리로 임명하자, 사헌부(司憲府)는 그가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높여서 서용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당시 중종은 사헌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이적을 그대로 교리로 임명하였다. 교서관 교리 이후 그의 관력은 기록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같은 관찬 사료에서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에 매우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다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성품이 순박하고 기상이 온화하였으며, 사람들을 관대하고 후하게 대하면서 잘 용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산을 모으는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