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년 9월 양군의 1·2차전투였던 개평(開平)싸움과 묵장(墨匠)싸움에서 패한 거란유민군은 묘향산으로 패주하여 보현사(普賢寺)를 불지르는 등 최후의 발악을 서슴지 않았다.
이때의 전투는 고려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고려의 3군이 거란유민군을 추격, 2,400여 명을 베고 노획하였으며, 또한 남강(南江)에 익사한 적도 1,0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하며, 적의 나머지 무리들이 밤을 타 창주(昌州 : 昌城)로 도망할 때에는 그의 부녀와 소아를 길가에 버리니,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많은 소가 우는 것과 같았다 한다.
3군은 각각 2,000병사를 보내어 추격하니 적이 버린 물자·양곡·병기·의장 등이 길에 널렸는데, 적은 우마를 다시 길들여 쓸 수 없도록 허리를 끊거나 뒤를 찔러 길가에 버리고 달아났다.
고려의 추격병들은 청새진(淸塞鎭 : 熙川郡)에서 적과 싸워 많이 베고 노획하였으며, 특히 평로진(平虜鎭 : 永柔)의 도령(都領) 녹진(祿進)도 또한 적을 쳐서 70여 명이나 죽이니, 적은 드디어 청새진을 넘어 달아나 숨었다.
이 향산전투에서 적의 장수 걸노(乞奴)가 그들의 내분으로 인하여 죽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나머지 무리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아아(鴉兒)도 약산사(藥山寺)에서 피살되었다는 설이 그 아내라고 하는 사람에 의하여 전하여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