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서울 성균관대학교 내에 공자와 중국·우리나라 유학자를 모신 문묘이다. 1398년에 창건했다. 앞쪽에 대성전, 뒤쪽에 명륜당을 둔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 형식이다. 창건 당시 이곳은 96칸으로 사당 기능과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1895년부터는 교육 기능을 상실한 채 문묘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다. 광복 후에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개교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학으로 개명하였다. 1963년에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분리되었다. 이곳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규모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96칸에 달하였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화재로 소실되어 1409년(태종 9)에 중건하였다. 이후 전사청, 향관청(享官廳), 장서각 등 여러 건물들을 더 세웠지만 임진왜란 때 전사청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 34) 중건공사에 착수하여 대성전을 완공하고, 2년 후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을 중건하였다. 1606년(선조39)에 명륜당을 중건하면서 비로소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1626년(인조 4)에는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經閣), 양현고(養賢庫), 진사식당 등을 재건하였으며, 1653년(효종 4)에는 향실(香室)을 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조선 말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고종 32)부터는 갑오경장의 여파로 인해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문묘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과 함께 성균관은 더욱 침체되었다.
1930년에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고,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변화되었다가 1943년에 폐교되었다. 광복 후에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개교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학으로 개명하였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었고, 1963년에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분리되었다.
『태학지(太學志)』에는 문묘 시설에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제기고(祭器庫), 비각(碑閣), 신문(神門), 동삼문(東三門), 동고(東庫), 동서협문(東西夾門), 수복청(守僕廳), 전사청(典祀廳), 포주(庖廚), 악기고(樂器庫), 차장고(遮帳庫), 악생고(樂生庫), 향관청(享官廳), 감찰제집사방(監察諸執事房), 수라각(水刺閣), 정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교학시설로는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대문(大門), 존경각(尊經閣), 비천당(丕闡堂),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정록청(正錄廳), 식당(食堂), 양현고(養賢庫), 육일각(六一閣), 어서비각(御書碑閣)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평지에 자리하여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삼문(神三門), 대성전, 명륜당은 남북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대성전 앞에는 동 · 서무가 명륜당 앞에는 동 · 서재가 서로 마주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다. 남쪽 문묘 영역에는 대성전과 동 · 서무, 묘정비각이 자리하며, 문묘 영역의 서쪽에는 제기고, 재학당, 희생청이 자리하고 있다.
강학영역의 동쪽에는 진사식당, 서리청, 비복청, 정록청, 육일각 등이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존경각, 향관청 등이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의 서북쪽에는 비천당(丕闡堂)이 있으며, 그 뒤쪽에 계성사(啓聖祠)가 있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전국 최고의 대성전답게 규모와 건축형식이 우수하다. 대성전은 명륜당, 동 · 서무, 신삼문과 함께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은 정면 3곳에 판문을 달고 나머지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는 등 일반적인 묘(廟)의 건축형식을 취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공자와 사성(四聖),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육현(宋朝六賢),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해동십팔현은 공문제자와 중국의 유학자 112인과 함께 동무와 서무에 나누어 봉안되어 있었으나 해방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대성전에 이안하였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본채가 있고 본채 좌우에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협실(夾室)이 부설된 건물이다. 본채는 이익공계 건물로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공간으로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시설하였다. 협실은 본채보다 지붕이 한 단 낮으며 공포도 초익공으로 처리하여 본채보다 격을 낮추었다. 평면은 6칸 중 마루가 4칸, 방이 2칸이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시대 국가이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 중 하나로서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최고의 문묘이자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건축연대가 비교적 빠른 편이며, 건축수법도 우수하여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