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후궁이다. 1499년(연산군 5)에 태어나 1549년(명종 4)에 사망했다. 1507년 궁녀로 입궐하여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를 모시다가 후궁이 되었다. 1530년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군을 낳았다. 1543년 종3품 숙용이 되었고 정3품 소용의 지위에 올랐다. 중종이 승하한 후 문정왕후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문정왕후와 사이가 돈독하였으며, 명종과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했다고 한다. 1577년에 정1품 창빈으로 추봉되었다.
아버지는 안탄대(安坦大)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아버지 안탄대는 중종반정의 원종공신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의 관직을 받았고, 후에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하였고,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장남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를 낳았고, 차남 이이수(李頤壽)는 일찍 사망하였다. 1526년(중종 21)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낳았으며, 1530년(중종 25) 3남 덕흥군 이초(李岹)를 낳았다. 1549년(명종 4) 사제(私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51세였다.
9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대비전(大妃殿)에서 중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모셨다. 이때 정현왕후에게 품성을 인정받아 중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20세였던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되었고, 22세가 된 1520년(중종 15) 상궁(尙宮)이 되었다.
영양군과 정신옹주를 낳은 후 31세였던 1529년(중종 24)에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해 3월 왕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내 · 외명부를 거느리고 창덕궁에서 친잠례(親蠶禮)를 할 때 함께 의식에 참석하였다. 이듬해 1530년(중종 25) 32세의 나이로 덕흥군을 낳았는데, 그가 선조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5)에 종3품 숙용(淑容)이 되었고, 이후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후에 궁궐에서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창빈안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여 왕대비 · 왕비의 인정과 신뢰를 받았다. 특히 창빈안씨가 사망한 후에 문정왕후가 그녀의 자녀들을 돌보아주었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하였다.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하여 이것이 훗날 하성군이 즉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1549년(명종 4) 사망한 이후, 그녀는 소용의 지위에서 1577년(선조 10)에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다. 장남 영양군에게 후손이 없자, 창빈안씨의 신주를 덕흥대원군의 사당으로 옮기도록 하였고,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에게 봉사(奉祀) 하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의 상소로 창빈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웠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있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의 동작리(현재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국립묘지 내에 있는 창빈안씨 묘소는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683년(숙종 9)에 신정(申晸)이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쓴 ‘창빈안씨 신도비(昌嬪安氏神道碑)’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