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차 발굴조사 중 저수지 유구에서 발견되었으며, 7~8세기 신라의 지방 목간문화와 문서행정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유물이다.
이성산성 출토 목간은 다면형·원주형·장방판형·홈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는 신라목간의 일반적 특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무진년(戊辰年)'명 목간은 3면에 걸쳐 26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앞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 南漢城道使…, [옆면]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뒷면] ■■浦 ■■■■■■…이다. 목간에서 남한성과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도사(道使)라는 지방관이 보여 지방행정과 관련해 이성산성이 지방통치의 거점으로서 기능하던 곳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벼루의 출토는 문방구의 유통과 소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문서행정과 관련하여 국가권력이 율령국가의 지배도구였다는 일본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겠다. 32번 목간의 일부 글자를 '욕살'로 판독하여 고구려 지방 관직으로 이해하고 고구려의 목간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벼루가 포함되어 있어, 목간의 묵서 및 그와 관련된 문화현상으로서 문자사용의 본격화를 보여준다.
이성산성 저수지 유구에서 출토된 신라의 목간은 A지구 1차에서 15점, 2차에서 9점, C지구에서 14점 등 전체 38점이며, 이 가운데 묵서흔적이 확인되는 것은 13점이다.
이성산성 출토목간은 공간적으로 왕경이 아니라 지방에서 사용되었으며, 시간적으로는 월성해자 출토목간과 안압지 출토목간의 중간에 위치하여 고대 한국 목간문화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