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선(亙璇, 1767~1852)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1767년(영조 43)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茂長)에서 출생하였다.
긍선은 선운사(禪雲寺)의 시헌(詩憲)에게 출가하고 연곡(蓮谷)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21세 때 화엄 교학의 종장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에서 상언에게 배우고, 순창 구암사(龜巖寺)에서 상언의 제자인 설봉 회정(雪峰懷淨)으로부터 편양파(鞭羊派)의 주류 법맥을 이었다. 26세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설법을 시작하여 대중 100여 명에게 설법을 하였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학문을 닦고 연구에 전념했다. 45세 때인 1811년(순조 11) “불법의 진실한 뜻은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 데 있다.”고 하며,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조직하였다. 그 뒤 선법과 이름을 널리 떨치면서 호남의 선백(禪伯)으로 불렸다. 한편, 그가 쓴 선 지침서인 『선문수경(禪文手鏡)』은 이후 '선 논쟁'을 촉발시켰다. 1830년 구암사로 돌아온 긍선은 선강(禪講) 법회를 열었다. 1840년부터 화엄사(華嚴寺)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852년(철종 3) 4월 입적하였다. 당시 세수 85세, 법랍 73세였다.
긍선이 입적한 후 구암사에 탑이 세워졌고, 1858년에 선운사에 김정희가 비문을 쓴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가 세워졌다. 『선원소류(禪源溯流)』와 『산사약초(山史略抄)』를 지은 설두 봉기(雪竇奉琪, 1801-1876)가 그의 제자이다.
긍선은 저서로는 『선문수경』, 『수선결사문(修禪結社文)』, 『법보단경요해(法寶壇經要解)』, 『오종강요사기(五宗綱要私記)』, 『선요기(禪要記)』,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등 주로 선(禪)과 관련된 주석서를 다수 남겼다. 불교 의식 및 의례집인 『작법귀감(作法龜鑑)』도 긍선의 저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긍선은 『선문수경』에서 선을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3종으로 분류한다. 조사선과 여래선은 격외선(格外禪)으로, 의리선은 교육과 학문, 문자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한 낮은 단계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서 근기의 우열에 따라 선을 차등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였다. 또한 사람을 기준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을 기준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통적 통설이라고 반박하였다. 이후 의순의 설을 지지한 우담 우행(優曇禹行, 1822∼1881)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 긍선의 후손으로 그를 옹호한 설두 유형(雪竇有炯)의 『선원소류』 등이 연이어 나오면서 선 논쟁이 확산되었다.
19세기 '선 논쟁'에서는 선과 교의 관계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18세기 성행했던 화엄 교학을 배경으로 '조사선과 화엄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 사상의 흐름 속에서 나온 주제였다. 백파 긍선은 계율과 화엄, 선 모두에 정통했던 승려로, 선의 우위와 임제종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