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선생집』은 고려 후기, 학자 도은 이숭인의 시·서·전·찬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1406년에 태종의 명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최립에 의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863년과 1901년에 이숭인의 후손들에 의해 재간행되었다. 이숭인은 문학과 도학을 겸하여 「처용가」·「정과정곡」·「제승사」·「오호도」·「초옥자전」 등 뛰어난 시문을 남겼다.
보물 제1465호. 5권 1책(시집(詩集) 3권, 문집(文集) 2권). 목판본(木版本).
간행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저자의 생전(生前)에 지어진 두 편의 서문(序文)과 세 편의 발문(跋文)이 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쓰인 발문은 이색(李穡)이 그에 대해서 지은 것이다. 이색의 발문은 “정사년 11월 그믐날 3일 전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은 뒤에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도은의 시 두어 편을 읽었다.[丁巳仲冬晦前三日, 晨興盥櫛, 焚香危坐, 讀陶隱詩數篇]”로 시작된다.
따라서 이숭인이 31세 되던 1377년(우왕 3) 11월 27일로 추정되나, 시의 초고(草稿)를 간행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도은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라고 하였지만, 그 간행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더욱이 저자인 이숭인의 생전에 간행되었다 하더라도, 그 판본이나 책의 권수는 알 수가 없다.
이색의 발문 다음에 붙은 발문은 명나라 사람 장보(張溥)가 지은 것으로, 이숭인이 39세 되는 1385년(우왕 11) 10월에 지어졌다. 마지막 발문은 명나라 고손지(高巽志)의 것으로, 이숭인이 43세 되던 공양왕 1년에 지어졌다.
또한, 서문 가운데 제일 먼저 지어진 서문은 이숭인의 나이 39세 때 명나라의 주탁(周倬)이 지은 것이다. 그 다음 서문은 이숭인의 나이 42세 때 1388년에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다.
그 뒤 이숭인이 죽은 지 14년째 되던 해인 1406년(태종 6)에, 태종(太宗)의 명에 의해 2책으로 편찬된 『도은집』이 있다.
이후에 최립(崔岦, 1539~1612)이 『도은시집』을 활자본(活字本)으로 간행하였는데, 「신인도은시집발(新印陶隱詩集跋)」이 『간이집』에 실려 있다.
1863년에 이숭인의 후손 이준호(李俊浩) · 이도복(李道復) 등이 연보(年譜)와 행장(行狀)을 저술하고 여러 사람들의 문자를 수집하여, 이들을 부록(附錄) 2권으로 만든 후 원집의 뒤에 붙여 7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1년에 이숭인의 19세손 이규형(李圭衡)이 다시 여러 문헌을 근거로 삼아 연보를 다시 만들고, 이숭인의 사적(史籍)을 모아 속집(續集)을 만들었다. 7권 2책의 목판본으로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이락정(二樂亭)에서 간행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62-23)에 소장되어 있다.
1959년 가장 최근에 판각된[近刻] 『도은집』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여계명현집(麗季名賢集)』으로, 1973년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으로 간행되면서 시집 3권, 문집 2권 등 목판본 5권을 영인(影印)하였다.
역주서로는 1975년에 대양서적(大洋書籍)에서 『한국명저대전집』 중에 『도은집』을 번역하여 수록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그의 후손인 이동석(李東錫)이 소장한 목판 2책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이 책 외에 속집 2권이 있으며, 부록으로 이숭인에게 보낸 다른 사람들의 시문(詩文)이나 여러 문헌에 남은 이숭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기도 하다.
『한국문집총간』 제6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8년 완역(完譯)되었다.
『고려명현집』(영인본)의 내용을 보면, 권1에는 사(辭) 1편과 오언(五言) · 칠언(七言) 고시(古詩) 30제(題)로 모두 31제가 있고, 권2에는 오언 · 칠언 율시(律詩)로 154제, 권3에는 절구(絕句) 152제로 시만 모두 336제이고 사가 1편이다.
권4 · 권5는 문(文)으로 기(記) 7편, 지(誌) 1편, 서(序) 12편, 전(傳) 2편, 제후(題後) 3편, 의(議) 1편, 행장 1편, 찬(讚) 1편, 설(說) · 전(箋) 각 1편, 표(表) 17편, 전 4편 등 모두 51편이 실려 있다.
「시(詩)」 중에는 “신축년 동짓달에 임금의 행차가 남쪽으로 순수하다(辛丑仲冬大駕南狩)”와 같은 저자 15세 때의 시가 있고, 「처용가(處容歌)」와 「정과정곡(鄭瓜亭曲)」 및 단오(端午)와 팔관회(八關會)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경향의 시도 상당수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승사(題僧舍)」와 「오호도(嗚呼島)」를 들 수 있다. 「제승사」는 “산 남쪽 산 북쪽 좁은 길이 갈렸는데/송화가 비에 젖어 이리저리 떨어지네/도인이 물을 길어 모옥으로 돌아가니/한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山北山南細路分 松花含雨落繽紛 道人汲井歸茅舍 一帶靑烟染白雲]”로 되어 있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의하면 “이색이 ‘당나라 시에 가깝다’고 평가하자, 이숭인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한다. 또한, 이숭인은 「중원잡제(中原雜題)」 · 「영안남(咏安南)」 · 「영유구(咏琉球)」등의 시를 남겨,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안남(安南)과 유구 등의 풍속(風俗)과 문화 교류(文化交流)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문(文)」을 보면 표(表)가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와 원나라 간에 외교 문서의 교환이 빈번할 때, 이숭인이 문서 작성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그중 「초옥자전(草屋子傳)」은 당시 정계(政界)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 김진양(金震陽)을 다루었는데, 이 글에서 이숭인은 김진양의 내면세계(內面世界)에 대하여 깊이 공감한 바를 나타내었다.
「기(記)」에는 당시 불교와 관계가 있는 글이 많다. 그중에서 특히 「여흥군신륵사대장각기(驪興郡神勒寺大藏閣記)」는 이색이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까지의 경위를 서술한 명문(名文)으로, 이숭인과 불교와의 관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 솜씨 또한 뛰어난 글이다.
「서문(序文)」 중에는 시와 관계되는 서(序)가 5편으로 그의 문학관(文學觀)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