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불탑이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해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로, 서원 금당 앞에 있는 이 석탑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석탑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탑이며, 목탑의 구조를 석탑으로 재현하였다. 무너져서 거의 절반 정도만 남은 탑을 2009년 해체·수리하다가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같이 발견된 탑지에서 왕비가 639년(무왕 40)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三院)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거의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에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 족집게 1점,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40)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 · 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탑은 동북쪽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탑신은 동북측으로 6층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가구식 기단이다. 하층기단의 지대석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갑석을 놓았다. 동면 좌우측 갑석 모서리에는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2구의 신장이 배치되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높은데 여러 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로 갑석을 덮은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을 수매의 돌로 짜 맞추어 마치 목조건축의 결구를 연상시킨다. 초층 탑신은 초석을 놓고 민흘림이 뚜렷한 기둥으로 각 면 3칸을 나누었는데, 목조건축과 같이 그 내부를 벽체처럼 구성하였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고막이석과 하인방을 놓았고 기둥과 기둥 상부에는 창방(昌防)과 평방(平枋)을 두었다. 초층 탑신 중앙에는 사방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었는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기둥으로 심주를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도 구조에 있어 1층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처마는 비교적 얇은 편이며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모서리에는 상하로 원공이 있어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로는 3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5층부터는 4단으로 늘어난다. 옥개석의 상단에는 1층과 2층은 1단, 3층부터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 · 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의 ‘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적심시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석재를 올리기 위한 임시구조로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녹로(轆轤)와 유사한 거중기 시설이었음이 밝혀져 탑 건립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