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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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우찬성, 의정부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계(子啓)
시호
공간(恭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4년(세종 16)
사망 연도
1509년(중종 4)
본관
밀양(密陽)
주요 관직
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형조판서|우찬성|의정부좌찬성
관련 사건
무오사화|중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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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우찬성, 의정부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계(子啓). 박강생(朴剛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서관정자 박절문(朴切問)이고, 아버지는 정난공신(靖難功臣) 박중손(朴仲孫)이며, 어머니는 공조정랑 문성조(文承祚)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3년( 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 · 부교리를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거쳤다. 예종이 즉위하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 한성부우윤, 호조참판을 거쳐, 1472년( 성종 3) 진하사부사(進賀使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473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옮겨 공조참판 · 첨지중추부사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7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해인사 소장의 대장경 판목을 봉심했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관방 시설과 군자 확보에 힘썼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부임하자 임금에게 시폐(時弊)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받아들여졌다. 이어 동지중추부사 ·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1489년 사헌부대사헌에 재임되었다. 이 때 재이(災異) 방지책 등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492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조사(正朝使)에 지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회피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강등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일처리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의정부좌참찬에 이어서 우찬성에 올랐다.

그 뒤 좌찬성으로서 지경연사(知經筵事) ·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고,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가 되어 군기 개선에 노력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반정에 동조해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며,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목계일고(木溪逸稿)』
『이악정집(李樂亭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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