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后)를 지낸 성석용(成石瑢),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성달생(成達生),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한 성승(成勝)이다.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는 현감을 지낸 박첨(朴襜)의 딸이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는 김잉(金仍)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 태어났다. 1435년(세종 17)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43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다시 급제하였다. 성균관 주부(成均館注簿)를 시작으로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과 직집현전(直集賢殿)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주부 시절부터 이미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요동에 파견되어 운서(韻書)에 관한 내용을 조사해 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신숙주와 함께 문자 · 음운 등에 관련된 업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관련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세종 대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요동에 파견한 것은 명나라의 황찬(黃瓚)을 만나 어음(語音)과 자훈(字訓) 등을 질정(質正)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황찬은 명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요동에 귀양 와 있었다.
이후 성삼문은 『동국정운(東國正韻)』, 『홍무정운(洪武正韻)』, 『사성통고(四聲通考)』 등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해 성과를 도출하였다.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 있을 때는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단종 대에는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병요(兵要)』를 수찬하였다.
1453년(단종 1)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에 임명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적을 인정받아 수충정난공신(輸忠靖難功臣)에 녹훈되었다. 성삼문은 권준(權蹲)과 함께 공신 녹훈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세조 즉위 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455년(세조 1)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세조 2)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있을 때, 정창손(鄭昌孫)의 사위였던 김질(金礩)이 세조를 인견하고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하여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이 신숙주(申叔舟) · 권남(權擥) · 한명회(韓明澮)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도모하였다는 내용을 알렸다.
당시 김질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이 성삼문이었다. 세조는 숙위하는 군사들과 승지들을 불러 모으고 성삼문을 제압한 뒤 직접 심문하였다. 취조를 통해 성삼문이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 · 박쟁(朴崝) 등이 함께 공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성삼문은 의금부에 하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남아 있다.
성삼문 등은 세조 대 이후에는 역모를 도모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1478년(성종 9) 남효온(南孝溫)은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는 세조를 비롯해 그의 측근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효온의 상소는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성종 대부터 성삼문과 박팽년 등에 대한 평가에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아직은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남효온은 「육신전(六臣傳)」에서 성삼문과 박팽년이 단종 복위를 주도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단종 복위와 관련된 6명의 신하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중종 대와 선조 대의 논란을 거쳐 1691년(숙종 17) 숙종은 특명을 내려 단종과 여섯 신하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 신하의 관작은 회복되었다.
1709년 경상도 의성(義城) 금학산(金鶴山) 아래에 지역의 유생들이 성삼문의 사우(祠宇)를 짓고 박팽년 등 5명의 신하들을 함께 향사(享祀)하였다. 향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자 숙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세조가 성삼문에 대해 "오늘날 난신(亂臣)이나, 후세(後世)에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성삼문이 신숙주를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조 대와 시기의 차이가 크고 당대의 기록에서도 확인이 어려운 내용이라 역사적 사실로 설명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